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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언 Nov 26. 2021

그는 어떻게 그가 되었나

『방구석 미술관 1』이 불러일으킨 단상들

“나는 그녀에게 고흐의 풍경화와 자화상 중에서 어느 쪽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고객은 머뭇거리더니 자화상이 더 좋다고 말했다. 고흐의 자화상에 탐닉하는 자들을 나는 유심히 바라본다. 그는 고독한 사람이다. 자신의 내면을 한번이라도 들여다본 사람이다” -김영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中 


겸허히 고백하는 바, 저는 그림을 음미하는 심미안을 갖지 못했습니다. 부단히 노력했지만 여의치 않았죠. 바니타스 정물의 삼엄함과, <아테네 학당> 정중앙에 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손짓의 의미, “요즘은 파울 쿨레의 <앙겔루스 노부스>를 좋아해요” 따위의 말들을 주워섬기고 다니다보니 언제부턴가 지인들은 제가 예술에 조예가 깊은 줄 오해하더군요. 지식이라는 현미경 없인 예술을 있는 그대로 음미할 수 없는, 중증 불감증 환자의 애처로운 발악인지도 모르고 말이에요. 


타고난 미적 불감증 환자인 저를 먼저 매혹한 건 언제나 작품보단 작가의 생애 쪽이었습니다. 작가의 삶에 대한 지식이 작품의 객관적인 평가를 방해한다는 비판들에 일부 동의하면서도 저는 작가라는 인간 자체를 탐구해 가는 것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제가 고흐의 자화상을 사랑하게 된 건 그가 중증의 알콜중독자, 엄격한 목사 가정에서 내뱉어졌다가 돌아오지 못한 탕자, 처절하리만치 사랑을 갈구했으나 결국 갖지 못한 남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 였거든요. 그는 이같은 여정을 오롯이 걸어 결국 우리가 아는 그가 되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라는 청년이 자화상 속 그 고독하고 삼엄한 남자가 되기까지 겪었을 고초들. 그가 그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헤아리다보면 문득 내 안의 뒤틀린 옹이들과 흉터 자국들도 끌어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인간이란 간신히 자기 자신이 되기까지 무수한 생채기를 입어가며 분투하는 존재니까요. 


『방구석 미술관』 속 거장들도 이와 다르지 않았고, 저는 잠시 위로받은 기분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책은 그들 역시 각자의 약점과 공포, 한계로 고통받았고, 그럼에도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투쟁함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위엄을 쟁취해 냈다고 전하고 있죠. 가족들과의 사별로 각인된 죽음의 공포와 사랑의 잔혹함으로부터 도피한 남자(에드바트르 뭉크), 삶은 고통이라는 냉혹한 진실을 직면한채 끝까지 살아낸 여인(프리다 칼로), 성(性)의 쾌락 뒤에 도사리는 죽음의 그림자를 가감없이 그려내며 극복을 꾀한 청년(에곤 쉴레)... 다만, 너무 많은 예술가들의 생애를 책 한권에 욱여넣다 보니 한 두 개의 키워드만으로 작가들의 생애 전체를 설명하려 무리하는 점은 끝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신 돌아오지 않기를” -프리다 칼로, 사망 전 마지막 일기 中 


글을 쓰다보니 문득 프리다 칼로가 사망하기 며칠 전 썼다던 일기 속 문구가 떠올랐습니다. 오늘 날 프리다 칼로의 유언으로 통하는 문장이죠. <프리다>라는 영화에서 그 문장을 처음 접했을 때, 간단하기 그지없는 문장이 자아내는 아름다움을 끝내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젠 그 아름다움의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민한 시선으로 삶이 가진 허무함과 부조리함을 일찌감치 꿰뚫어 보았음에도 허무주의로 도피하는 대신, 가진 무기로, 끝까지 살아낸 자의 후련함이 농축된 문장이기 때문이죠. 


빈센트 반 고흐는 동생 테오 반 고흐에게 보낸 편지에서 “봄이 되면 종달새는 울지 않을 수 없다”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태어난 이상 저마다의 방식으로 힘껏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모든 인간은 한 마리의 종달새와 같지 않을까요. 춥고 시린 겨울에 얼어붙어 웅크려 있다가도 봄이 되면 울지 않을 수 없는. 


아무쪼록 건투를 빕니다. 각자의 목소리로, 끝까지 울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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