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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언 Jul 19. 2018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극복하려 애쓰지 마요

Everything changes but Nothing changes

출처=영화 <맨체스터 바이더 씨> 캡처
“ 삼촌은 잡역부잖아. 어디 살든 무슨 상관이야” 
-영화 <맨체스터 바이더 씨> 中   

 

 조카의 말대로였다. 리(케이시 애플렉)에게 묵을 장소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디에서 뭘하든, 그는 고향 맨체스터를 떠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가 걷는 거리의 모든 것들이 고향을 떠올리게 했으므로 그는 고향이라는 악몽 속에서 사는 셈이었다. 모든 걸 앗아간 그날처럼, 고향은 친형의 죽음이라는 상실로 다시 한 번 그를 소환해 왔다. 끌려온 고향에서 그의 분노는 발작적이었다. 가볍게 눈이 마주쳤을 뿐인 건너편 손님들에게 리는 친절한 인사와 함께 주먹을 휘둘렀다.     


 “ 내 고통은 자막이 없다 읽히지 않는다 ” 
- 김경주, 「비정성시」 中     

 

리에겐 가족이 없었다. 그의 선택이기도, 아니기도 했다. 그는 아내와 세 아이가 자는 새벽 2시에 혹한의 바람을 뚫고 장을 보러 갈 것을 선택했다. 아픈 아내와 아이들의 따듯한 밤을 기원하며 벽난로를 지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벽난로 안전막을 깜빡한 것, 불붙은 장작이 마룻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선택한 적은 없었다. 아내는 소방관들에게 가까스로 구조됐고 세 아이는 화마 속에 남겨졌다. 그때부터였다. 타는 듯한 슬픔이 그의 표정과 눈물까지 앗아간 건.      


출처=<맨체스터 바이 더 씨> 캡처


 영화 중반까지 리는 무례하고 무감한 건물 잡역부에 불과하다. 감독이 리의 상처에 대한 사연을 플래시백 기법으로 처리하기 때문이다. 술만 마시면 시비를 걸어 싸워대는 무뢰한, 고용주나 다름없는 세입자들에게 욕을 하는 다혈질, 친형의 시체 앞에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냉혈한. 리를 향해 찌푸려진 관객들의 미간은 그가 통과해온 절망의 경험이 제시됨과 동시에 언제 그랬냐는 듯 펴진다. 겉모습만으로 누군가를 재단하는 일의 공허함을 감독은 서사 기법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겨우 한 사람을 이해하는데 드는 품과 공이 이토록 크다. 타인을 평가함에 있어 늘 겸손해야 하는 이유다.     


출처=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캡처


 형은 리가 아들 패트릭의 후견인이 돼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유언장에 맨체스터로의 ‘이사비용’이 책정돼 있는 것을 보고 리는 경악한다. 맨체스터가 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형이었다. 패트릭이 맨체스터를 떠나고 싶지 않아할 것을 예상해서 였을까, 아니면 사고 후 십수년간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동생을 위한 극약 처방인 걸까. 정말 고향으로 대표되는 트라우마와 직면한다면, 드라마 속 한 장면처럼 상처는 극복될 것인가. 패트릭의 눈가는 번민으로 일렁인다.   

  

“Nothing Dramatic”
-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중


 많은 걸 상실해온 사람들이 만나 새로운 가족을 이룬다. 상처와 극복에 관한 가장 유명한 서사 구조 중 하나다. 그러나 케네스 로너건 감독은 리에게 말을 거는 노인의 짤막한 대사로 관객들의 기대를 저버린다. “Nothing Dramatic”. 현실은 드라마가 아니며, 치유되지 않은 채 평생 벌어져 있을 상처도 존재함을 암시하는 대사다. 리는 형의 가장 절친한 친구에게 조카를 입양 보내기로 하고 맨체스터를 떠난다. 조카 역시 “(이 도시를) 못 견디겠다”는 삼촌의 피맺힌 고백을 말없이 받아들인다. 어른이 된다는 건, 그저 견디는 게 최선인 고통이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일지도 몰랐다. 


*좌=<맨체스터 바이 더 씨> 시작 장면 / *우=<맨체스터 바이 더 씨> 엔딩 장면

 

 리와 패트릭의 낚시씬으로 시작한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낚시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삼촌 리는 유쾌했고 꼬마 패트릭은 그런 삼촌을 아끼고 따랐다. 함께 낚싯대를 드리우게 되기까지의 십여년 동안 두 사람은 많은 것을 떠나보내야 했다. 사랑하는 아버지와 자식들이 바로 그것이었다. 각자의 운명에게 대체할 수 없는 것들의 뺏긴 두 남자는 말없이 흔들리는 파도를 응시한다.     


 Everything changes but Nothing changes.
- 에르메스 지면 광고 중     


 모든 건 변했지만, 어떤 것도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서로를 아끼는 두 사람은 십여년 전 그러했듯 조의 고물 보트 위에 앉아 낚싯대를 드리웠다. 두 사람 사이에 대화가 없는 건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이 필요 없는 사이이기 때문일 것이다. 가족은 말없이도 능히 헤아리고 다독이는 존재들 아니던가. 모든 건 변해 갈테지만, 이 사실만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이자 형의 유산인 보트 위에서 흔들리는 두 남자의 등이 평화로워 보이는 건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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