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01. 자격의 문제
중년 남자가 교실 복도로 드러선다. 남자를 둘러싼 학생들의 울음소리는 개별적이지 않고 집단적이다. 공장 로고가 양각된 작업복을 입은 남자는 몹시 무거운 걸 든 듯 더디고 위태롭게 걷는다. 외동딸 J의 영정이다. 10대들의 영정은 하나같이 웃고 있다는 걸 열아홉인 당신은 알지 못했다.
그날의 당신, 혼자 교실에 남아 울음을 참고 있다. 슬픔은 자격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다. 비단 슬픔 뿐만이 아니었다. 같이 밥 먹자고 말할 자격, 침 흘리며 자는 당신의 모습을 몰래 찍어 돌려보지 말라 말할 자격, 네 샴푸 냄새를 좋아한다고 말할 자격에 당신은 자주 미달한다. 당신의 진심은 타인을 불쾌하거나 역겹게 만든다. 열아홉의 당신은 빨리 배운다.
“이 새낀 이런 날까지도 표정 변화가 없네”
“저 난리가 났는데도 뭐 이상한 일본 애니 노래 들은 거 아냐?”
“어후 소름끼쳐. 이따 부조금 모을 땐 내실 거고요?”
경멸의 외양이되, 어른스럽게 충분히 슬퍼한 자신이 왠지 자랑스러운 얼굴들이라고 당신은 생각한다. 동풍에 떠밀린 교실 창문의 커튼이 당신의 왼쪽 얼굴을 쓸어내린다. 그날 J와 함께 맞은 바람도 시원했다고 당신은 회상한다.
# S02. 그해 우리는
“넌 왜 혼자 있어? 점심도 안 먹고?”
“...”
“...잘됐다. 오늘 점심 반찬 핵망이라 나도 안먹을건데. 너가 나랑 좀 놀아주라”
“...”
“난 쩌어기 문과반에 J. 반가워!”
J는 교실 뒤편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친구들에게 가라고 손짓한다. 그들은 수군대거나 킬킬거리지만 J는 당신을 보고 있다. J의 질문 세례에 당신은 좋아하는 노래, 이상형 등에 대해 더듬더듬 대답한다. ‘뻥치지마. 외모보다 마음을 본다는 남자들 말 다 개구라임’과 같은 J의 너스레에 당신은 조심스레 웃는다. 다음 날도, 다다음날도 J는 당신의 반으로 찾아온다. 귀찮아도 팔자려니 하라는 J의 뻔뻔함에 당신은 한 번 더 웃어 보인다. 동풍이 부풀린 커튼의 주름 치마자락을 걷어내며 당신과 J는 자주 웃는다.
J 곁엔 사람이 많았다. 혼자인 법도, 혼자 두는 법도 없던 아이였다. 그런 J는 전기 합선으로 불이난 집에서 홀로 빠져나오지 못했다. J의 아버지는 딸의 담임에게 ‘주말엔 자기 베프가 영화 보여준댔다고 신나했었는데’라며 오열했다. 열아홉의 당신, J가 「극장판 나츠메 우인장」을 좋아했을지 알지 못한 채 어른이 된다.
#S03. 무너지진 않겠지만
서른셋의 당신, 끌려나간 동창회에서 도망쳐 밤거리를 걷는다. J의 이름을 한 번에 기억해내는 사람은 없었다. 풀옵션으로 뽑은 제네시스 g90의 하차감과 바람난 전처에 대한 성토에 떠밀린 J의 이름은 서너가닥 남은 콩나물 반찬 그릇처럼 치워진다. 너 연봉에 이정도 보험은 비싼 거 아니라는 보험 설계사의 설득에, 이번엔 서른셋의 당신이 역겨워한다. 한강변을 오래 걸었음에도 당신의 배신감은 수그러들지 않는다. J의 죽음에 열렬히 슬퍼한 자신들을 자랑스러워하며 당신을 조소하던 열아홉의 동창들을 당신은 기억한다. 당신은 토하고 싶어진다. 그때 L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혹시 바빠?”
“아니. 왜?
“저번에 내가 엄마 이혼 문제 때문에 전화해서 힘들다고 그랬었잖아. 너도 거의 밤새서 들어줬고”
“응. 그랬지”
“그 후에도 계속 나만 죽으면 다들 편해지지 않나 싶은 생각 때문에 무서워서. 남친은 그냥 그런 생각 그만하라고만 하고. 털어놓을 게 너밖에 없네. 미안해”
“...잘했어”
L은 자신의 죽음에도 그대로일 세상에 대해 말한다. 잠시 슬퍼해도 곧 일상을 이어나갈 친구들에 관해서도 당신은 부정하지 않는다. L은 당신을 특정해 재차 묻듯이 확신한다. 당신마저도 결국 완전히 무너지거나 파괴되진 않을 거라고. 당신은 혼자 떠난 J와, 혼자 울음을 참던 당신의 나날들을 생각한다.
“무너지진 않겠지”
“...그렇겠지?”
“근데 아주, 굉장히 오랫동안 슬퍼할거야”
“그걸 어떻게 알아? 죽은 직후에도 안 무너질텐데”
“...그렇더라고. 그러니까 넌 혼자 죽지마”
그때 불어온 동풍이 스마트폰 화면에 달궈진 당신의 왼편 얼굴을 식혀준다. 서른셋의 당신, 바람이 불어온 쪽으로 조심스레 웃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