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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언 Apr 03. 2023

P를 위한 축사-결혼 피로연에서

마지막 자원 축사

어떤 글을 무료로 써본 게 몇년만인지 이제 기억도 안난다. 한 때 작가란 게 돼보겠다고 마냥 열심히 쓰던 시절이 있었거든. 신기해. 누가됐든 내 글을 게재해 주세요 사정할 땐 개털이더니, 쓰는 족족 월급으로 직결되는 요즘엔 날 꽐라를 만들어서라도 축사를 확정 받겠다는 예비 부부들이 드글드글하군. 여하튼 인생이란. 그래도 너니까 기쁘다. 초봄의 신부 P. 컨그래츌레이션.


그거 알아? 우리의 시간 내내, 내게 너란 사람은 참 알다가도 모를 인간이었어. 너는 ‘일정 많은 사람과의 우정은 믿을 게 못된다’는 내 나름의 공식을 유일하게 빗겨간 사람이거든. 지금도 너말곤 딱히 틀린 적 없어. 난 우정이든 사랑이든 잘 안 믿거든. 안 믿으려고 해. 쉽게 신뢰받아온 인간들은 더 쉽게 저버리더군. P 너는 예외여서 문제였고.   


너한텐 그 밤이 어떻게 기억되는지 모르겠다. 내가 숨이 막혀 죽겠다고, 몹시 약해진 모습으로 전화했을 때. 우연히 넌 이틀 연속으로 저녁 약속이 취소됐던 이틀이라고 했었지. 그래, 너한텐 우연히 아다리가 맞았을 뿐인 이틀 밤이었을 거야. 그럼에도 그 운 좋았던 이틀 밤이 누군가에겐 잊히지 않을 위로가 되기도 하더라고. 모르겠다. 너한텐 별 일도 아니어서 이젠 지겨운  공치사일수도 있겠네. 별 수 없어. 너란 사람은 내게 그렇게 각인돼 있으니까. 잠시 닿아도 진심인 사람. 나처럼 타인에 지독한 회의주의자도 가끔은  ‘내가 틀렸다’고 자인하게 만드는 인간.


우리 솔직해져보자. 나는 너 결혼 않(사실은 ‘못’)할 줄 알았어. 너 스스로 생각해도 좀 안 어울리잖아? 너처럼 자유로운 영혼의 행로를 방해하지 않으면서, 다만 종점까지 묵묵히 동행할 사람이 있을까 늘 불신했었지. 게다가, 너나 나나 빨갱이잖아? 너처럼 맛집투어 좋아하는 사람이, 빨갱이다운 편견대로 가난한 신랑 만나서 헝그리하게 사는 건 상상이 잘 되지 않았어. 하지만 누가봐도 훤칠한데다 능력까지 있는 K씨가 신랑이라니. 너가 내 생각보다 자본주의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었구나 싶어. 마치 남자 얼굴엔 관심 없다던 이나영 신랑이 원빈인 것과 같지. P, 너 덕에 인생을 배웠어. 치얼스. 인생은 P처럼.


신기하지, 널 위한 축사를 쓰는 지금은 세상에서 글을 제일 못 쓰는 인간처럼 느껴진다. 뭐랄까... 이토록 완성된 인간의 새 출발에 굳이 내 축하가 필요한가? 하는 본질적인 의문. 축하하고픈 마음을 온당히 담기엔 현재 내 필력이 택도 없이 부족해서겠지. 그러게 내가 더 좋은 작가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 결혼하지 그랬어. 이 글의 형편없음은 내가 아닌 너 탓이란 뜻이지. ㅇㅇ 난 잘못 없음 ㅇㅇ.


이토록 조악한 축사조차 쓰는데 얼마나 고생했는지, 주변 친구들한테 ‘내 인생에 축사는 이게 마지막’이라 선언하고 다녔어. 글쎄, 이 글을 읽는 지금도 호심탐탐 날 취하게 하려는 예비 부부들이 적지 않으니 장담은 못하겠다. 진정 마지막 축사일진 알 수 없지만, 자원해서 쓰는 축사는 이게 마지막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 것 같다. P, 넌 나한테 그런 사람이야. 축하한다. 진심이다. 


너와 K의 연애는 꽤 길었지. 연애라는 둘의 예고편은 더할 나위 없이 보기 좋았어. 앞으로 수십 년간 상영될 본편 또한 예고편의 명성에 못지 않으리라 믿어.  러닝타임 긴 영화 딱 질색이지만, 이번 영화만큼은 엔딩 크레딧까지 볼 준비됐어.


이제 시사회 시작이다. 관객들도 준비됐어. 떨지말고, 너답게. 레디, 액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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