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놈봐라?’ 싶던 훈련소 소대장의 표정을 기억한다. 난 방금 집 근처 사단에서 군 복무를 하겠냐는 군의 배려를 거절한 참이었다. 특정 지역 출신의 병사들의 경우 집 근처 부대에서 군 복무를 할 수 있는 무슨 특별 규정이 있다고 했다. 당연히 관심 없었다. 현역병으로 자원 입대한 마당에 집 근처에서 군 복무를 한다는 건 코미디였다. 무려 군의 배려조차 거부하고 현역 자원입대를 택한 나. 웅장하게, 실상은 과도하게 팽창한 자존감도 있던 게 사실이다.
물론 지금은 다르다. 언젠가부터 난 입대를 앞둔 동생들에게 “합법적으로 안 갈 수 있으면 가지 말고, 편하게 갈 수라도 있으면 그렇게 가라”고 조언하는 어른이 됐다. 전역 후 받은 취급 덕분이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내 고향을 포함한 특정 지방들은 일명 ‘부대 상근병’으로 복무할 수 있는 일종의 특혜(?)가 특별법으로 규정돼 있었다. 쉽게 말해 출퇴근하는 군인들이다. 아침 9시까지 부대에 출근해 일과를 하고, 오후 6시면 집으로 퇴근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내 고향 동창들의 절대 다수는 신체 검사 결과와 무관하게 부대 상근병으로 전역했다. 애국심도 없는 주제에 난 동창 중엔 몇 없는 현역 자원병 출신이 된 셈이다.
자대 선임들은 ‘이젠 후회하지?’라는 말을 무슨 인사처럼 했었다. 미친놈처럼 보였겠지. 누가봐도 조직 생활 싫어하는 놈이 현역 자원 입대라니. 그러나 나는 의외로 군 생활 동안은 현역 입대를 한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다. 일단 동창회만 가면 상근병 출신들을 놀리기 바쁜 아버지의 미래 갈굼(?)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만 해도 적지 않은 이득이었다. 한달에 책을 4권씩 읽어나갈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었다. 감옥이 ‘작가 레지던스’라던 김영하 작가의 농담이 농담만은 아님을 그때 알았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고생하기 때문에 여러분의 친구들과 이 사회 모두가 발 뻗고 편히 잘 수 있는 겁니다. 숭고한 희생을 하고 있는거죠” - By. 모 사단 아무개 정훈장교의 정신교육 中
21개월 내내 선임병들도 못 심어준 ‘후회’라는 감정을 전역 후 만난 우리 ‘민간인’들은 너무 쉽게 선물했다. 내가 흙바닥을 기고, 보일러실로 끌려가 ‘넌 씨발 대가리가 있는 새끼냐’며 욕을 먹고, 트럭에 앉아 졸다가 총 끝에 광대뼈를 얻어맞아 부어오를 때 발 뻗고 편히 잤다던 바로 그 사람들이었다.
전역 후 대학생 대외활동 때의 일이다. 시사토론을 하는데 ‘미국에서 군인들에 대한 예우’가 논제로 올라섰다. 난 이 사회가 한국 군인들에게 보내는 멸시를 언급했다. 땅개, 군바리, 군무새... 농담을 가장한 조롱들. 재입대하는 꿈 속에서 목이 쉬도록 비명을 지르다 깨는 전형적 트라우마 증상이 ‘썰’로 전락한 현실들.
그러자 한 팀원이 기가 차다는 듯 말했다. “형, 미군은 다 자원입대한 사람들이잖아. 우린 끌려간 거고. 강제 의무를 수행한 것 뿐인데 무슨 존경을 받아”. 맞아맞아, 까르르 까르르, 좌중에서 꽃망울같은 웃음이 터졌더랬다.
“그럼 우린 부모님한텐 왜 존경하고, 키워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리냐? 자식 낳았으면 성인이 될 때까지 키워야 한다는 법적 의무를 다한 것 뿐인데? 애 낳아만 놓고 굶기거나 양육 안하면 형사처벌 받아. 탈영병이나 입대 거부자들처럼”
“....”
“당연히 미군들처럼 자원 입대자들이 훨씬 더 존경 받아야지. 하지만 숭고한 의무를 끝까지 해낸 것도 최소한의 존경은 받을만한 일이라는 거야. 군바리니 뭐니 조롱 대신”
침묵. 그러나 난 그 침묵이 동의의 결과라 착각할만큼 멍청하지 못했고, 현역 자원입대를 후회하는 어른이 됐다. 후배들한테라도 더 나온 조언-“군대 합법적으로 뺄 방법 있으면 빼라”-을 할 수 있게 깨우쳐줘서 감사하다고 해야하나.
전역하고 몇 년이 지나자 성평등의 돌풍이 온 사회를 휩쓸었다. 나와 동생을 낳았다는 이유로 선임연구원의 직책을 내려놓으며 오열했다던 우리 엄마, 면접에서 ‘그래서 애는 낳을 겁니까’ 따위의 질문에 답해야 했다던 주변 친구들, 새벽 산책을 사랑한다는 내 말에 ‘나도’가 아니라 ‘부럽다’고 답하던 동생... 이 돌풍은 더 거세져야 한다고, 그렇게 믿은 날들도 있었다.
근데 ‘군 복무’와 ‘대우’가 화두가 되면 “고맙다” “고생 많았다” 대신 “남자가 쪼잔하게”라는 말이 돌아왔다. 가끔은 남자들에게도. 이 사회에 불어닥치는 성평등의 조류를 내가 단단히 오해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면 아직 갈 길이 너무 먼 것이거나.
꼰대인 나는 ‘남자다움’을 이렇게 이해한다. 가장 빛나는 청춘의 시기를 강제로 군복무에 징집당한 거대한 희생에도 ‘Thank you for your service’ 한 마디면 족한 담대함이라고. 희생에 대한 조롱을 참아내는 건 남자다움과는 무관하다. 이건 지킴받은 사람들이 지켜준 사람들에게 갖추는 최소한의 예의에 관한 문제다.
소설가 김훈은 평발을 내세우는 아들을 기어이 입대 시키며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생각의 나무 출판)라고 못박았다. 이 시대 몇 안남은 유교 선비를 자처하는 그다운 준엄함이다. 그러나 쪼잔한데다 선비조차 못되게 생긴 나는 김훈의 말을 이렇게 변주한다. 희생에 걸맞은 최소한의 존경을 보낼 자신이 없다면 다시는 ‘숭고한 희생’을 강요하지 말라고. 나는 가끔 현역 자원입대를 후회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