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에 대한 심리부검 보고서 1
말하자면,
K의 냉소주의는 친구들 사이에선 유명했어요. 인간이 태어난 데에 거창한 의미 따윈 없고, 존속이 위태로운 건 인류지 지구가 아니며, 사랑과 우정에 따라붙는 휘황한 미사여구는 사실의 서술이 아닌 희망사항이다. 그런 거라도 믿어야만 이 무의미하고 권태로운 인생을 견딜 수 있다, 뭐. 술에 취한 K는 대개 그런 식이었어요.
처음엔 순진한 친구 몇몇이 K의 말에 상처받고 했어요. 하지만 요샌 그런 애도 없었죠. 마지막으로 모였을 땐 그런 K를 보며 다들 ‘집에 갈 때 시간이 됐구나’하고 끄덕이고 말았어요. K는 늘 그랬으니까. 만취한 K를 택시에 태워보낸 친구가 뜬금없이 그런 말을 한 게 기억이 나네요. “애는 여린데...외로워서 저래. 외로워서”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어요. 알고보면 K는 여린 사람이었거든요. 냉소주의 말고 K가 취했다는 걸 보여주는 버릇이 또 있었는데, 뭔지 아세요? 인사요. K는 아직 말을 놓지 않은 사람들과 술을 마신 날이면 헤어질 때 꼭 예의 90도 인사를 했어요. 사람들이 탄 택시들이 출발할 때까지 몇 번이고요. 웃기잖아요. 몇분 전까지 우정이고 사랑이고 다 쓸데없다고 시니컬하게 단정짓던 인간이. 언젠가 K한테 대체 왜 그러는지 물어보니까 한참을 머뭇거리다 말하더군요. 마치 수치스러운 비밀을 털어놓는 사람처럼요. “나땜에 기분 상한 사람 있으면 용서해 달라고”. K가 그렇게 되고 며칠 지나서 우연히 읽은 책에 그런 문장이 나오더라고요. ‘인생을 살면서 힘들 땐 가끔 질소 같은 허세가 필요하겠다’. 잘은 모르겠지만 인간을 대하는 K의 태도도 내내 그랬다는 생각이에요.
그러고보니,
그렇게 가기 전에 K가 뜬금없이 전화가 와서 그런 말을 했었어요. 정신과엘 다녀왔다고. 무슨 일 있냐니까 딱히 그런 건 아니래요. 친구랑 얘기 하다보면 한 번씩 그럴 때 있죠? 왠지 ‘왜 그런데, 말해봐’라고 닦달해주길 내심 기다리는 느낌. 근데 나는 그걸 다 듣기엔 너무 여유가 없을 때.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요새 우울한 사람 많다던데 잘했다고요. 사실 걔가 우울한지 불안한지 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요. 그랬더니 K는 아... 하더니 그래그래 하면서 얼른 전화를 끊더라고요. 바쁜데 미안하다면서. 그게 마지막이었네요.
그러니까 K는요,
아무튼 외로웠던 사람인 것 같아요.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타인한테 거는 기대가 많았던 거고요. 본인도 그 낙차를 잘 아니까 사랑이든 우정이든 다 쓸데없다 어쩌고 선언을 하고 다녔던 게 아닐까. 지도 남 같아지려고. 사실, 인간관계가 진짜 쓸데없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걸 남들한테 설득할 필요성도 못 느끼거든요. 쓸데없다, 가 아니라 쓸데 없다고 말하는 나를 봐줘, 였던 거죠. 그래도 그렇지. 그 나이에 고독사가 뭐야 고독사가. 남한테 90도 인사말고 악이라도 쓰고 가지. 유서도 무슨 "내가 맞았다"가 뭐냐고. 궁상맞게... 아 잠시만요, 죄송해요.
(인터뷰이 요청으로 인터뷰 일시중단)
그래도 어제 발인 전날 친구들이 몇년 만에 다 모였네요. 생각해보면 친구들한테 모이자, 만나자 하는 건 늘 K쪽이었거든요. 앞으론 K 기일 즈음에 다들 모여서 밥이라도 먹자고 약속했어요. 제안한 친구가 “그렇게라도 안 모이면 K의 성악설이 옳았다는 걸 증명하는 거잖아. 니가 틀렸어, 하고 힘껏 증명해 주자고” 해서 다들 웃었네요. 내년에 우리가 정말 모일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K는 위에서 내심 흐뭇해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냉소주의자인 K는 누구보다 사람을 좋아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