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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언 Jul 17. 2024

"어쨌든 K씨는 성실한 환자였습니다"

K에 관한 심리부검 보고서 2


K씨의 소식은 엊그제 퇴근하기 직전에 형사분께 들었습니다. 그때,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저 레지던트 때 지도교수님들 생각이 나더군요. 그분들은 같은 소식을 듣고도 대체로 침착하셨어요. 정확한 시간에 오전 회진을 돌고, 점심에 나온 중국식 볶음밥을 꼭꼭 씹어드셨죠. 인턴 딱지를 갓 뗀 저는 ‘아, 정신과 의사 노릇도 10년쯤 하면 환자를 잃어도 현자처럼 초연해지는구나’하고 우러러 봤었어요. 근데 저도 지금쯤 되니까 알겠더군요. 침착한 얼굴로 회진을 돌던 교수님들은 다만 어금니를 악물고, 볶음밥 알갱이를 하나하나 깨뜨려가며 견디고 계셨던 겁니다. 내가 뭘 더 잘할 수 있었을까, 수도 없이 되물으면서요. 어이쿠, 선생님 잔이 비신 것도 모르고. 


에... 그러니까... 물론 K씨는 고독했고, 명백히 우울해 했습니다. 직장 안팎의 인간관계가 흔들릴 때면 가끔이지만 공황 증세도 나타났고요. 그럼에도 저는 제가 K씨한테 뭘 해드릴 수 있는지, 이분은 어떤 걸 원하며 여기 오셨는지 도통 감을 잡을수가 없었어요. K씨와의 대화는 늘 뭐랄까... 삶의 의미, 이런 식으로 다분히 철학적으로 흘러갔거든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얘기를 들어드리거나 항불안제 처방 정도. 언론에서 외로움이 흡연보다 해롭네 뭐네 떠들어도 그게 의학적 증상은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의학이 아닌 인생의 문제에 정답을 드릴만큼 현명한 인간이 못됩니다. 제 인생도 어떤 면에선 엉망이거든요. 어쨌든 


K씨는 2년 내내 성실한 환자였습니다. 보름마다 정확한 시간에 진료실로 오셔서는 그간의 투약 현황을 보고하셨어요. 며칠날은 뭐 땜에 약을 20분쯤 늦게 먹었고, 이날은 아예 깜빡했고... 그런 걸 폰에 전부 기록해 오셔서 저한테 브리핑하시는 거 있죠? 분명 삶에 대한 의지가 있는 분이셨어요. "저는 뭘 더하면 나을 수 있는 걸까요". 브리핑을 마친 K씨의 미간은 저한테 매번 그렇게 묻는 것 같았죠. 선생님, 그거 아세요? 저를 믿는 성실한 환자들이 답 없는 물음에 절박하게 매달리는 걸 손 놓고 바라만 보는 거, 그거 정말 할 짓이 못됩니다. 게다가 제가 더 화가 나는건요,


이 성실한 사람들은요, 인생에 무슨 문제가 생기든 꼭 자기 탓을 해요. 일단 다 자기 때문이래. 어릴 때 이걸 잘못 택했고, 직장 상사를 너무 믿으면 안됐고, 그때 떠나던 그 사람한테 좀 더 매달렸어야 했고... 근데요. 인생에서의 본인 과실 비율이라는 거, 무슨 보험사가 교통사고 조사하듯 몇 대 몇, 그렇게 간단히 책정되는 거 아니거든요. 살아온 환경도, 마주한 사건도 사람마다 다 다른데. 근데 이분들은 매번 본인이 용의자고, 죄인이고, 전과자야. K씨도 딱 그랬어. 어이쿠, 제가 오늘 좀 취했네요. 아뇨, 제가 닦을게요 


아참, 이것도 선생님 작업에 도움이 되실진 모르겠지만요. K씨가 지난 달 마지막 진료 때 뜬금없이 웬 영화를 한 편 보고 왔다고 했어요. 무슨... 일본 영화였는데? 《카메라를 멈추면 안돼!》? 저예산 좀비영화 제작 현장에서 배우가 감독한테 개기든, NG를 내든 무조건 원테이크로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찍어야 하는 어느 감독의 이야기라더군요. K씨는 자기가 그 영화감독이 된 기분이라고 했어요. 본인 인생은 정말 NG의 연속인데, 자긴 카메라를 잠시도 내려놓을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딱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카메라를 내려놓고 영화를 다시 찍고 싶다고. 뭐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아요. 네? K씨가 그 말을 하던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요? 음... 그렇다면 저는요...  


지금 맘 같아선 ‘맘에 안드는 배우들 다 잘라버리고 연기는 K씨가 해요’라고 말하고 싶네요. 알고보면 배우들도 각자의 사정이 있겠지만, 뭐 그게 K씨가 알 바 냐고요. 정작 성실했던 K씨는 결국 그렇게 갔는데. 영화는 이미 크랭크인 됐고, 감독은 K씨잖아요. 속으로라도 좋으니 힘들 땐 남 탓도 좀 해보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제작 과정이 뒤죽박죽 엉망이었더라도 여전히 훌륭한 영화들이 세상엔 많이 있다는 것도요. 언젠가 K씨를 다시 만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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