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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언 Jul 23. 2024

참 무해한 당신

"이젠 내가 보일거야"


“이제는 보이겠지”

코너는 해리를 두들겨 패며 계속 말했다.

“이젠 내가 보일거야”

- 패트릭 네스 作, 『몬스터 콜스』 206p


1.


얼마 전부터 당신과 어깨를 부딪히는 행인들이 늘어났다. 이상한 건, 충돌 직전까지 사람들이 당신의 존재를 전혀 인지하지 못한 듯 보였다는 점이다. 행인들은 당신과 어깨가 부딪힌 후에야 몹시 당황한 얼굴로 사과하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간혹 드센 노인들은 그렇게 갑자기 튀어나오면 어떻게 하느냐며 검붉은 감태나무 지팡이를 허공에 휘둘렀다. 언제나 어깨를 반쯤 뒤로 접어 상대의 길을 터주던 쪽인 당신은 영문도 모른 채 사죄한다. '죄송합니다'라고 발음할 때의 안면부 근육 움직임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당신은 생각한다.


비슷한 상황은 직장인 공업용 볼트 공장에서도 반복된다. 당신이 속한 제품 검수팀의 점심시간이란 딱히 정해진 게 없다. 정오 즈음, 얼마 전 룸쌀롱 2차를 갔다 이혼 당했다는 작업반장이 “에이 씨부랄 거, 밥 먹고 하자”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게 점심시간의 시작벨이다. 출근과 동시에 밥 생각뿐이던 무기 계약직과 알바들은 사료를 뿌린 저수지 속 잉어들처럼 와르르 일어난다.


손이 느린 당신, 그때쯤 대개 검수중인 볼트에 허둥지둥 버니어 캘리퍼스를 대며 ‘잠깐만요 잠깐만’하고 중얼거리곤 한다. 당신의 양쪽 옆자리 40대 주임들은 못마땅한 듯 눈을 샐쭉하게 뜨면서도 당신을 기다리며 수다를 시작하는 것이다. 요령 없이 성실하다니까? 실속이 없는거지, 계속 저러면 와이프도 답답할 걸. 깔깔깔.


하지만 며칠 전부턴 그 둘조차 당신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구내식당으로 달려가곤 했다. 한 번은 미리 장비를 내려놓고 작업반장의 구령을 기다리기도 했으나, 둘은 애당초 당신이 거기 없다는 듯 군다. 목소리가 너무 작은 탓인가. 당신은 그리 여기기로 한다.


2.


“나 왔어”


당신의 귀가를 아내인 S는 알아채지 못한다. 꽃무늬 브이넥 원피스 두어벌을 들고 안방 화장대와 옷방을 오가는 탓이다. S는 몇달 전 ‘낭만산악회’라는 동호회에 들어가면서부터 부쩍 꾸미기 시작했다. 이번만큼은 데시벨을 좀 더 올려보는 당신이다.


“나 왔다고”

“어어, 왔구나. 뭐 이리 소리도 없이 들어와”

“...오늘 간다는 거, 산악회라고 하지 않았어?”

“그치, 왜”

“아니, 그냥... 치마 입고 등산이 되나 싶어서”

“아....그게”


당신과 눈을 맞추던 S는 일순 시선을 내리깔며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다. 뭔가를 숨기거나 궁리해낼 때마다 S가 짓곤하는 표정이다.


“그...산악회장 오빠가 오늘 몸살이 났대서, 등산 대신 막걸리집에서 회원들끼리 한잔하자더라고”

“....늦게 들어와?”

“엉 아마? 막차 끊기면 저번에 나 재워준 그 산악회 언니네서 자고 오려고. 기다리지 말고 자”

“...그래”


당신은 울컥 치받쳐 올라오는 말들을 삼키며 소파에 주저 앉는다. 가령 '딴 새끼랑 뒹굴려면 모텔 영수증 정돈 버리는 성의는 보이지 그래'와 같은 말들. 차키를 챙기던 S는 본인 이마만한 앞머리 헤어롤을 조신히 풀며 옆에 앉아 팔짱을 낀다. 당신 앞에서 짐짓 숙연한 체 하려는 듯한 몸가짐이다.


“오빠아~ 화내는 거야? 나 요새 맨날 나가서?

“아니... 무슨 화가 나...” 당신은 말을 끝맺을 수 없다. 당신의 볼에 S의 입술이 쥐어박히듯 내리찍혀서다. S는 용수철처럼 소파에서 튕겨져 나간다.

“우리 오빤 늘 다정해서 좋아. 다녀올게~!”


철제 현관문이 세게 닫힌다. 복도의 꿉꿉한 곰팡이 냄새가 밀려들어와 당신의 오른쪽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다. 멍하니 있던 당신은 문득 자신의 손을 들어 뚫어지게 바라본다. 당신의 손바닥은 정말 시선에 뚫리기라도 한 듯, 뒤편 TV의 검은색 화면을 슬쩍 비춰보인다.


3.


(1보) “난 투명인간”…아내 살해한 40대男, 구속 순간에도 ‘횡설수설’


(서울=국민뉴스) 이성 문제로 불화를 겪던 아내를 목졸라 살해한 40대 남성이 결국 구속됐다.


22일 법조계에 따르면, 중앙지방법원 김철민 영장전담판사는 살인 혐의를 받는 40대 남성 A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김 판사는 이번 결정과 관련해 "피의자의 정신상태 등을 고려할 때, 검찰 측이 주장한 도주의 우려가 넉넉히 인정된다"고 설명했다.


A씨는 이날 오전 10시20분쯤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면서 범행 동기를 묻는 취재진에게 “나는 투명인간”, “이제 내가 보일 것” 등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반복했다.


(곧 후속보도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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