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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언 Sep 05. 2024

일상의 소중함...라고 할 뻔

ⓒ픽사베이

잃어야만 뒤늦게 그 존재를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공기와 같은 것들이 그렇다.


공기는 원래, 그냥 있는 거다. 심호흡이 생활화된 명상 수련자가 아니고서야 공기의 존재를 매순간 인지하긴 어렵다. 그러다 자유형 중 고개를 드는 타이밍을 잘못 잡았을 때, 목이 졸렸을 때, 공황장애에 의한 과호흡이 왔을 때에야 비로소 깨닫고 마는 것이다. 당연한 듯 존재하던 공기가 실은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허리 디스크로 고통 받는 요즘의 내겐 일상이 공기다.


20분 이상 걸어야 하는 일정이 잡히면 전날 아침부터 몸 관리를 한다. 1시간마다 알람에 따라 맥킨지 신전 운동을 하고, 잠을 설쳐 근육이 뭉칠새라 오랜 취미인 녹차 마시는 건 내일로 미룬다. 잠들기 전 얕은 베개를 허리 밑에 대고 30분쯤 누워있는 것도 잊어선 안됐다. 이쯤되니 외출 일정을 잡는 것 자체가 피곤해졌다. 밥 한끼 먹으려 벼 모종부터 심어야 하는 기분이었달까. 점차 집안에만 머물며 유튜브 세상을 탐험하는 시간이 늘어만 갔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그새 더 똑똑해졌다. 접속만 하면 세상의 온갖 아픈 사람들 얘기를 메인화면 상단에 배치해줬다. 디스크 탈출증을 비롯한 정형외과적 질환은 물론 각종 말기 암 환자, 절단사고 피해자들까지 다양했다. “과학 기술의 눈부신 발전”이란 흔해빠진 관용구가 무색할만큼 세상엔 아픈 사람들이 차고 넘쳤다. 그리고 환자들은 일상을 되찾기 위해, 혹은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고 영상 자막 혹은 나레이션을 통해 입모아 말했다.


나를 비롯한 여러 환자들이 이미 잃었거나 잃고 있는 ‘일상’이란 대체 뭘까. 명의로 이름난 한 정형외과 의사는 모 건강 정보 프로그램에서 일상생활을 ‘출·퇴근과 장보기, 청소처럼 일상에서 필수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것들의 총합’이라 말했다. 등산, 나들이, 자전거 타기처럼 생명 유지에 필수적이지 않은 여가 활동은 일상생활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반면 인터넷 포털 국어사전은 일상을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로 규정하고 있었다. 매일같이 통증과 싸우는 환자에겐 고통이 일상이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최소한 내가 잃어버린 일상은 그 어느 쪽도 아니다.


그래서인지 투병중인 유튜버들이 말하는 일상이란 단어 앞엔 늘 ‘평범한’이란 수식이 따라 붙었다. 나 또한 언젠가부터 ‘평범한 일상’이란 표현을 전보다 자주, 힘주어 발음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아프기전엔 이 평범함이 소중한 줄 알지 못했다. 다시 일상을 되찾는 날엔 매순간 기쁨과 감사로 하루를 시작하고 끝마치리라...라고 할 뻔.


웃프게도, 나는 앞선 코로나19 팬데믹 시국에 비슷한 취지의 글을 이미 여러 편 썼다. 사회적 거리두기만 풀리면 그땐 어쩌고 저쩌고... 당연히 지극히 평범한 나는 되찾은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평범하게 잊었다. 그러므로 내가 정녕 알지 못했던 건 일상의 소중함이 아니라, 그 평범함을 비범하게 기억하고 감사해하는 법이었던 셈이다. 평범한 일상을 또 한 번 되찾을 미래의 나는 이번엔 다르게 기억할 수 있을까. 이미 여러 번 글을 통해 경솔했던 나로선 장담할 수 없다.


출처 : 논객닷컴(http://www.nongaek.com) 연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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