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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 Choi May 22. 2018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오카야마 고라쿠엔에서

초등학교 시절부터 생각하면, 계획을 세운 역사는 꽤 오래 됐다. 그만큼 계획대로 살지 않은 역사도 오래 됐지만. 요즘엔 그래도 요령이 생겨서, 최대한 느슨하게 계획을 세우려고 하는 편이다. 그냥 이번 주에는 딱 이거 세 개만 해야지’, ‘오늘은 이것만 끝내자 정도로만 계획하고 실천해나가도 삶 꽤 만족스러워 지는 것 같다. 그게 설령 이번 주에는 꼭 치킨을 먹자! 같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사실 계획을 세우는 것과 계획대로 실천하는 것, 그리고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계획을 세운다고 해서 꼭 그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계획한 대로 모든 게 이뤄졌다고 해도 생각했던 목표에서 상당히 먼 지점에 와 있을 수도 있다. 노릇하고 야들야들한 오믈렛을 만들어 내는 게, 결국 하늘의 뜻에 달려있는 것처럼. 

 

그래도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꽤 즐거운 일인데, 왠지 계획을 정성들인 글씨로 써놓고 나면 조금은 훌륭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오카야마 공항은 매우 작은 공항이었습니다. 약간 시골 버스 터미널 같은 느낌도  나고 말이죠.


이번 여행은 사실 처음부터 계획대로 되지는 않았다. 출발 날짜를 갑자기 정한 탓에 비행기 티켓이 없었던 것이다. 오사카 간사이 공항으로 가는 티켓은 열흘 뒤까지 매진이었다. “목적지는 교토. 어떻게든 가까이에서만 내리면 된다.”는 생각으로 대충 제일 빠른 날짜에 근처 가까운 도시였던 오카야마행을 끊었다. 심지어 아침까지 도시 이름도 헷갈렸다. 오카자와? 오카나와? 


아침 비행이라 너무 일찍 도착한 바람에, 짐을 기차역 코인락커에 넣고 대충 발걸음 닿는대로 오카야마 성이나 보자는 생각으로 시내로 나갔다. 오카야마 성은 보통 하얀 벽으로 된 다른 성들과 달리, 까만색 판자로 칠해져 있어 꽤 정취가 있는 성이었다. 일본에는 지역마다 예전 봉건영주들이 지은 성이 하나씩 있는 것 같은데, 꽤 보존이 잘 되어있어서 볼 때마다 부러운 부분이 있다. 


오카야마 성. 까만 판자로 되어 있어 "까마귀 성" 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고 합니다. 오사카 성이나 히메지 성과는 달리, 관광객은 대부분 일본인이었습니다.


일본 어느 성을 가든 보이는 장식. 용의 머리에 잉어의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에 한글 안내가 꽤 보이는데, 대체로 이렇게 한 두 군데씩 틀려 있습니다. 왠지 귀엽지 않나요?


충격은 그 다음에 왔다. 오카야마 성 입장권과 고라쿠엔 입장권을 같이 팔길래, 이름도 몰랐던 이 도시에 언제 또 오게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 라는 생각으로 패키지를 사서 고라쿠엔에도 가보기로 했는데, 좁은 다리를 건너 작은 문을 지나 들어갔을 때 펼쳐지는 정경이란, 정말 충격적이었다. 너무 아름다워서 뒤통수를 한 대 세게 맞은 것 같았다. 건너편 사람이 점처럼 보일 정도로 탁 트인 잔디밭에, 한 쪽에는 잔잔한 시내가 흐르고 다른 한 쪽에는 벚꽃비가 휘날리는데, 어느 쪽으로 걸어야 할지 생각하느라 잠깐 머뭇거렸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예전에 영국식 정원과 프랑스식 정원의 차이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영국식 정원이 좀 더 자연을 손대지 않고 그대로 두는 방식이라면, 프랑스식 정원은 자연을 잘 계획하고 다듬는 방식이랄까. 나무를 세모 모양으로 다듬는다든지, 꽃을 좌우대칭으로 심는다든지 해서 말이다. 이 고라쿠엔도 상당히 잘 계획된 방식으로 조성되어 있었는데, 벚나무, 대나무, 열대나무가 계획된 위치에 심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호수의 흐름과 징검다리까지 깔끔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지베르니에 가보지는 않았지만, 모네가 반한 일본식 정원이란 것도 아마 이런 풍경이 아니었을까.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벤치에 앉아 잠깐 숨을 돌린 뒤에 인터넷을 찾아보니, 고라쿠엔은 일본의 3대 정원 중에 하나라고 한다. 어쩐지 기모노에 하카마를 입은 일본인 커플들이 웨딩 촬영을 많이 하고 있더라니. (입은 옷만 다르지, 웨딩 촬영의 분위기는 어쩐지 다 비슷한 풋풋함이 있기는 하더군요.) 



오른쪽 멀리 보이는 게 오카야마 성. 가운데 철교를 도보로 건너면 왼쪽이 고라쿠엔입니다. 


근래에 본 가장 넓은 하늘. 제 사진 실력으로는 풍경을 다 담아내기가 어려웠습니다.


일본 내에서도 꽤 유명한 곳인지, 신혼 부부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정말 많았습니다.


공원을 한 바퀴 도는 데는 두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다. 오카야마 역으로 돌아가는 길에 근처 백화점 꼭대기 층 아무 식당에나 들어가서 돈가츠 카레를 시켰는데, 쫄깃한 힘줄과 짭쪼롬한 카레 소스가 생의 감각을 흔들어 주었다...고 할 것 까지는 없지만, 아무튼 맛있었다. 일본 여행 중에 밥 때를 놓치면 가까운 백화점 푸드코트에 간다. 10대 째 대를 이어가는 장인의 손길 같은 건 없을 수도 있지만, 실망시키는 적은 거의 없다. 


아마 애초에 계획한 대로 오사카행 비행기를 탔더라면 오카야마와는 평생 인연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모든 것이 계획대로 착착 실행되어 가야만 한다는 자기 규제를 갖게 되어버린 게 아닐까. 우연히 손에 든 책에서 평생 잊지 못할 글을 읽게 되기도 하고, 우연히 떨어진 이름도 모르는 도시에서 가슴이 탁 트이는 풍경을 마주하기도 하고, 우연히 마주친 사람에게 반하게 되기도 하면서, 왜 당연히 평소에는 모든 사소한 것들까지 계획한 대로 되어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물론 비행기는 아무 데나 떨어져도 돈가츠 카레를 먹어야겠다는 멋진 계획이 있었던 덕분에, 어떻게든 꽤 맛있는 돈가츠 카레를 찾아낼 수 있기는 했다. 그렇다면 역시 내일 뭘 먹을까 정도를 고민하면서 즐겁게 생활하는 것이 좋겠다. 다른 것들이야 뭐 가끔 계획대로 되지 않더라도 괜찮겠죠.




알고 보니 지추 미술관이 있는 나오시마가 오카야마에서 가깝더군요. 오카야마에 다시 가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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