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지나간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선풍기를 켜야 잠들 수 있었는데, 어느덧 아침저녁으로 꽤 선선해졌다. 에어컨 청소를 미리 해야 한다고 부산을 떨던 게 엊그제 같은데, 왠지 본격적으로 덥기도 전에 끝나버린 기분이 든다.
이번 여름 가장 선명한 장면은,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진 뒤에 떠오른 쌍무지개와 붉은 저녁노을이다. 활활 타오르는 붉은빛으로 물들이는 노을은 매년 8월 초에만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지구가 약간 기울어진 채로 태양을 도니까, 해가 가장 아름답게 지는 각도는 일 년 중 이맘때에만 만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일 년 중 이맘때에만 만날 수 있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 있다면 바로 수박이다. 늦은 저녁 땀을 뻘뻘 흘린 채 집에 들어와서, 샤워를 하고, 에어컨과 선풍기를 동시에 튼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수박을 통째로 꺼내 단면을 2cm 정도 두께로 잘라낸 뒤, 깍둑깍둑 썰어 락앤락 통에 수북이 담는다. 한 입에 딱 맞는 사이즈의 수박 조각을 포크로 하나씩 집어 먹으면서 유튜브를 보는 시원한 저녁.
수박을 한 조각씩 입에 넣을 때마다 입 안 가득 퍼져나가는 달콤하고 시원한 과즙을 음미하면서, 시시껄렁한 유튜브 채널을 돌리거나 스포츠 뉴스를 보는 여유로운 한여름 밤. 어느새 한 통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그 많던 수박은 다 어디로 갔을까 - 하는 패턴이 매일 반복된다.
어떤 음식이 굉장히 먹고 싶다는 건 몸이 그 음식의 영양소를 간절히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아마도 땀을 많이 흘렸으니 수분을 보충하라는 의미에서 수박이 당기는 게 아닐까. 듣기에 좋은 걸 보니 아마 사실은 아니겠죠.
의외로 수박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주변에 꽤 있는데, 내 동생도 그중 한 명이다. 수박의 껍질 쪽으로 갈수록 오이와 비슷한 향이 난다나. 비슷한 이유로 참외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름 일리가 있는 의견이긴 하다. 나 같아도 수박에서 민트 초코 향이 난다면 선뜻 먹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다. 매일 밤마다 그렇게 수박을 그렇게 먹었더니, 인생 최대 몸무게 기록을 경신하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매일 아침마다 팀원들과 이런 대화의 패턴이 반복된다.
"아... 오늘도 체중이 늘었어요."
"ㅋㅋㅋ 어제도 수박 먹었어요?"
"네."
"ㅋㅋㅋ..."
"ㅋㅋㅋ..."
어제저녁, 이번 여름의 마지막 수박을 끝냈다. 왠지 아쉽다기보다는 '좋은 승부였다.'는 마음. 덕분에 좋아하는 음식과 체중 감량 사이에서 갈등하는 천만 다이어트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달까. 민트 초코 같은 음식을 좋아했더라면, 자기 전에 양치를 하는 수고라도 덜을 수 있었을 텐데... 하긴 무슨 음식이든 간에 이렇게 밤에 많이 먹으면 살이 된다고 하긴 하니까 참고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