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의 눈으로 배워가는 것들
독일의 4월은 분주하다. 이 서쪽 숲의 지역은 특히나 여전히 오래된 신앙의 리듬 위에 놓여 있기에 부활절은 단순한 기념일이 아니라 한 해의 중심에 가까운 시간이다. 가게의 매대엔 토끼 모형들과 달걀, 닭과 선물들이 앞다투어 놓이고, 그 모습에 아이들은 한층 설레는 마음을 키운다.
이곳에서 진심으로 환영받았고, 그러기에 잘 녹아들었다지만,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이방인일 내가 이들의 설렘을 온전히 공감하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다. 어떤 준비가 기다리고 있는지, 이 시기에 집은 어떤 모습을 해야 하는지. 다른 아이들은 부모의 시간과 함께 보고 따를 그림이 있을 텐데, 그게 없는 나는 열심히 곁눈질을 하며 혹여나 외국인의 아이들이기에 누리지 못하는 것이 있지 않을까 형체가 없는 것들을 알아차리기 위하여 마음을 쓴다. 그래서 이곳의 준비는 늘 몸을 움직이는 방식으로 시작된다.
서쪽숲의 사람들은 부활절을 앞두고 아이들과 함께 이끼를 모은다. 나에게 이끼는 축축하고 미끌거리는 기억뿐이라 이끼를 모은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그것이 어떤 은유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그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말이 그대로 일이 되었다. 남편은 아이들을 채비시키고 나를 재촉해 양동이를 들고 길을 나섰다. 정말로 깊은 숲에 들어가 바위 위에 내려앉은 이끼를 찾고 모으기 시작했다. 숲의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분위기는 점차 조용하고 신비로워졌다.
서쪽숲의 이끼는 부드럽고 기분 좋은 촉감이었다. 손끝으로 누르면 천천히 다시 올라오는, 물을 머금은 쿠션 같은 감촉이었다. 남편과 아이들은 발을 멈추어 넓은 돌 위에 얹혀 있던 이끼를 마치 깨지기 쉬운 무언가처럼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나에겐 너무나도 생경한 행동인데, 이곳의 모두가 이 기억을 갖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아이들은 차곡차곡 쌓여가는 양동이를 들고 돌 사이를 오갔고, 남편은 조금 더 크고 두툼한 이끼를 골라냈다. 나는 그 뒤를 따라 걸으며, 처음으로 이끼를 모으는 일을 해보았다.
집으로 돌아와 우리는 그 이끼들을 정원 곳곳에 놓았다. 화단 옆 작은 구석에도, 눈에 잘 띄지 않는 목재 위에도. 이 이끼들은 부활절 토끼가 와서 머물고, 아이들을 위한 선물을 놓고 갈 수 있는 둥지가 된다. 아이들은 아직 오지 않은 토끼를 기다리며 잔뜩 신난 모습이다. 나는 그 옆에 서서 생각한다. 이 서쪽숲에는 내가 처음 겪는 것들이 아직도 많다. 이끼를 모으는 일도, 그것을 정원에 놓는 일도,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며 설레는 일도. 이방인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배워야 했던 새로운 언어보다도 먼저, 몸이 기억하고 있는 것들이 없다는 뜻에 가깝다. 이곳에서 자란 사람들에게 이끼를 모으는 4월은 설명이 필요 없는 기억이다. 부모의 손을 잡고 숲에 들어갔던 날, 양동이가 차오르던 감촉, 정원에 둥지가 만들어지던 오후. 그 기억은 말이 되기 전에 먼저 몸 안에 자리를 잡는다.
나에게는 그 시작이 없었다. 하지만 내 아이들에게는 있다. 오늘 이 숲에서 이끼를 처음 집어 들던 손의 감촉이, 양동이를 들고 돌 사이를 오가던 발의 기억이, 언젠가 아이들 안에서 설명할 수 없는 익숙함으로 남을 것이다. 내가 갖지 못한 것을 아이들은 갖게 되어 좋다. 아이들에게 앞으로 많은 것을 물려줄 것은 이 숲이고, 이 계절이고, 이곳의 시간이다. 나는 다만 그 곁을 지키며 이 자리에 있었다. 행복한 이방인인 채로, 그러나 이 봄의 한가운데에 서서, 나는 오늘도 이 숲이 아이들에게 건네는 것들을 조용히 받아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