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기반으로 비현실과 현실의 경계에서 작성하는 픽셔널(fictional) 에세이. 길었던 팬데믹의 끝자락에서 지난 시간의 촌극을 회상한다.
세계 보건기구(WHO)에 따르면 2020년과 2021년 코로나로 사망한 사람이 1,500만 명 정도가 된다고 한다. 전 세계로 따지면 500명 중 한 명꼴로 사망한 것이 된다. 실제로는 이 숫자보다 훨씬 더 많을 수도 있다고 본다. 인도의 공식 코로나 사망자는 48만 명 정도지만 세계 보건기구는 330 ~ 650만 명으로 보고 있다. 전 세계 누적 확진자는 5억 1720만 명에 육박한다. 미국의 누적 사망자만 해도 100만 명을 넘었다. 국내 누적 확진자는 1756만 4999명(2022년 5월 10일 기준), 누적 사망자는 2만 34000명으로 치명률은 0.13%에 달한다.
백 년 만의 팬데믹이라고 하니 스페인 독감에 대해 조금 찾아보았다. 당시 세계 인구가 약 17억 명이었는데, 감염자는 약 5억 명에 사망자는 최소 1,700만 명에서 최대 5,000만 명이라고 한다. 치명률은 3~9%, 전체 인구의 1~3%에 해당되는 수치다. 1차 세계대전의 사망자수인 900만 명의 2배~5배에 다다르는 엄청난 수치다.
한 사람의 죽음이 감염병 통계로 기록될 때 인간으로서의 맥락은 전달되지 못한다. 삶의 끝에 대한 존엄이나, 의미나, 가치 같은 것을 떠나 하나의 높고 낮은 숫자에 기여한다. 하루는 사망자 수가 줄었으며, 하루는 사망자 수가 늘었다. 우리는 이례적인 숫자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첫 확진자, 첫 사망자가 나왔을 때와는 사뭇 다른 반응이다. 400여 명의 사망자가 나오다가 100여 명으로 줄어들면 상황이 나아지는 것이며, 다른 나라보다 치명률이 낮은 편을 잘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방역 상황이 충분히 통제되고 있다고 본다. 그러니까 숫자로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한 때는 매일 같이 확진자 수가 발표되기를 기다렸었다. 이상하게도 늘 그 시간이 되면 뉴스를 틀어놓거나, 인터넷 뉴스로 확진자 소식을 찾아봤다. 몇 명의 확진자가 어디서 나왔는지 모든 언론이 떠들어대고 있었기 때문에 가장 ‘잘 팔리는’ 코로나 뉴스를 보란 듯이 소비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재난방송을 보는 마음이다. 어디서 지진이 났는지, 쓰나미가 일어났는지, 홍수, 태풍, 산사태 같은 천재지변에 세상이 어떻게 흔들리는지 이번엔 어떤 일이 있는지 블록버스터 영화처럼 편집된 자극적인 영상을 보면서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코로나도 마찬가지다. 뉴욕에서는 시신을 둘 곳이 없어서 아무렇게나 쌓아져 있거나,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병상이 없어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 완전히 죽음의 도시가 되어버린 외국의 낯선 풍경들을 관람했다.
사람들의 관심은 다른 이야깃거리로 옮겨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살아남을 사람은 살아남고, 살아남지 못하는 사람들은 살아남지 못한다. 살아남지 못한 자는 숫자로 남는다. 그들의 이야기에는 더 이상 조명이 비추어지지 않는다. 운이 좋지 않았거나, 기저질환이 있거나, 유전적으로 바이러스에 더 치명적이거나 어떠한 이유에서건 말이다.
결국 이야기 없이 숫자로만 남은 죽음을 마주하면 허무함이 남는다. 어쩌면 그렇다. 죽음 그 자체만큼 인간에게 평등한 것은 없다. 돈이 많건 적건, 어떻게 태어났건, 나이가 많건 적건 (평균 수명이라는 것은 있지만) 언젠가 모든 인간은 죽는다.
죽음의 기록은 평등하지 않다. 실크에 쌓인 죽음이 있는가 하면 콘크리트 바닥에서 끝나는 죽음도 있고, 명예로운 죽음이 있으면 개죽음도 있다. 개인의 영역에서 평가하는 죽음과 사회적으로 평가되는 죽음에는 분명한 다름이 있다. 나에게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 어떻게 모든 사람에게 같은 의미일 수 있겠나. 하지만 적어도, 아주 작은 죽음이라는 건 없다. 아주 큰 죽음이라는 것도 없다. 그런데 왜, 숫자에 낀 죽음은 존엄을 잃고 어느새 초라해지는지. 왜 어떠한 죽음은 난데없는 조연으로 추락하고야 마는지. 팬데믹의 끝자락에서 숫자만 남은 죽음들을 보며 의문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