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심리상담을 받았다. 상담이라고 해도 별 기대는 안 했다. 돈이 없어서 한 시간에 4만 원을 넘지 않는, 대학원 학생들이 공부 과정에서 상담을 하는 그런 곳이었기에, 난 부담도, 내가 나아질 거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는 지난 몇 주 동, '죽어도 괜찮겠다', '이렇게 자서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등등의 이 생각들을 빨리 없애고 싶다는 생각에,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상담을 신청했다. 상담을 시작하는데 첫 상담은 나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이었다. 나의 기본정보, 내가 살아왔던 환경, 그리고 나의 성장들. 나는 처음엔 빨리 끝나겠다 싶었다. 24년의 인생 동안 말할게 뭐가 있겠냐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말하다 보니, 50분의 상담시간 안으로는 끝나지 못했고, 결국 나는 세 번째 상담까지 나의 인생을 읊었다. 그래도 돈은 냈는데 할 말은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덤덤하게 내 인생의 처음부터 시작했다.
난 1997년에 태어났다. 우리 가족은 분당에서 엄마, 아빠, 그리고 두 언니들로 이루어진 평범한 가족이었다. 그때는 한국이 IMF를 겪었을 때였다. 우리 엄마가 했던 수학과외도 애들이 많이 나가서 더 이상 진행을 할 수 없었을 때였다. 게다가 우리 아빠는 유학 준비를 하고 있었을 때라 직장을 다니지 않으셨다. 그런 와중에 우리 엄마는 셋째 딸인 나를 임신하신 것이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나를 가지신 엄마의 입덧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온갖 구하기 힘든, 비싼 음식들만 당겨하셨다. 한겨울에 수박이라던가, 그때는 비쌌던 고기라던가. 그런 음식으로 배를 채우신 엄마는 내가 마지막 아이이겠다 싶어 처음으로 진통제를 맞지 않으시고 제왕절개를 하셨다. 아픔 속에서 나를 낳으시고 엄마는 회복도 못한 채 과외를 진행하셨고, 2년 뒤에 우리 가족은 호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사실 내가 2살이 채 안돼서 호주 유학을 떠났기에 나는 호주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나의 기억은 훗날 호주에 있을 때 찍은 사진들로 조작되어버렸다. 그 사진 속 나는 지금 봐도 참 못나 보인다. 내 머리카락이 워낙 느리게 자랐어서, 내가 나온 거의 모든 사진들은 내 머리에 손수건이나 모자가 써져있었다. 왜 이렇게까지 했을까라는 생각에 그나마 아무것도 없이 찍은 사진을 봤더니 금방 납득했다. 내 둥그런 머리 위에는 고작 다섯 가락의 머리카락이 곱슬거리며, 존재를 최대한 드러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마치 손가락 다섯 개가 떨어지지 않기 위해 두피를 움켜쥐는 느낌이었다. 이걸 보며 엄마가 나의 머리에 많이 신경을 쓰셨다는 생각에 감동해서 갑자기 나를 많이 사랑하신다고 느꼈던 기억이 있다. 내가 가진 호주에 대한 기억들은 이게 전부이다. 내 인생의 일부분을 잃은 느낌이라 좀 실망스럽긴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다섯 개의 머리카락을 가진 기억은 사실 잃어버려도 괜찮을 것 같다. 그래서 내 인생은 호주가 아닌, 미국에서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