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운동장(백석생활체육공원) 3편
우리 아버지는 1931년 8월 28일 서울 강서구 염창동(당시는 경기도 김포였다고 함)에서 태어났다.
1986년 그 어느 때
중풍으로 쓰러지기 전까지는
물구나무서서 걸을 정도로,
지리산을 종주할 정도로
강인하셨다.
아버지가 온전하게 걷지 못하게 된 그때
아버지 나이 56세, 내 나이 12세였다.
아버지는 쓰러지기 전에도 그 후에도
사람들을 대할 때면
정확한 표준어로 존댓말을 쓰셨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했던 존재가 쓰러진 것을
직접 본 나는 두 가지를 생각했었다.
첫째 혼자 살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
둘째 아버지를 지켜야 한다는 것!
초등(당시에는 국민)학교 5학년이었던
나는 하교하여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를 모시고 한강 또는 작은 산에 갔다.
그렇게 아버지의 재활과 운동을 도왔다.
지금 생각하면 뭘 지킬 수 있었겠나?
그냥 서로의 존재로 의지했겠지...
아버지에게는 내가
내게는 아버지가
같이 있어줘서
의지하여
걸었지!
그때 내 가치관의 90% 이상이 정립되었다.
아버지는 건강이 원인이 되어 약해졌고
나는 환경이 원인이 되어 강해졌다.
어금니를 깨무는 것을 배웠고
포기하는 법도 터득했다.
괜찮은 척하는 것도
그렇게 강제로
세상살이를
습득했다.
아버지의 존댓말은 한결같았는데
건강할 때는 자랑스러웠지만
아프신 후에는 약해 보여서 싫었다.
(내가 진짜 어른이 되기 전까지)
나는 세상과 싸우고 난도질당했는데
아버지는 그런 세상에 존댓말을 쓴다고
생각했다.
남들은 나를 봐주지 않았는데
왜 아버지는 그들에게 존댓말을 쓰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서 아버지와 떨어져 살게 되었고
자주 못 뵙게 되었다.
아버지는 태어난 곳에서 계속 사셨는데
나는 강원도, 전라도, 경상도, 경기도 등을 옮기며 살았다.
그리고 다시 서울에 살게 된 어느 때였다.
대략 2006년 정도 되었고
나는 뒤늦게 대학원에 갔다.
교수님의 언어가 멋스러워 보였다.
그분의 경어가 품위 있다고 생각 들었다.
그리고 집에 왔고
아버지와 식당에 갔다.
아버지는 여전히 세상과 존댓말로 소통하셨다.
교수님보다 더 정확한 표준어로
더 부드럽게 말씀하셨다.
진짜 품격이었다.
다시 자랑스러워졌다.
초등학교 5학년에 머문 아들이
마지막 남은 10%의 세상을 배운 것 같았다.
그 뒤에 정확히 10년 뒤
나는 그 고귀한 존댓말을 다시는 못 듣게 되었다.
그리고 나도 말을 쉽게 못 놓는 어른이 되었다.
아버지의 운동장(백석생활체육공원)에서
새벽에 어르신들이 그라운드골프를 치신다.
내가 트랙을 뛰면 신기한 듯 쳐다보신다.
그리고 천천히 정확한 표준어로 존대를 하여
"대단하시다!"라고 말씀하신다.
9년간 못 들은 고귀한 존댓말을 들을 수 있었다.
오랜만에 아버지를 느꼈고 자랑스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