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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을 뿐...그래야만 했던 것은 아니다.

2025 춘천마라톤을 뛰고...

by 난이

2025년 10월 26일 춘천마라톤이 있었고

나는 가을의 전설을 꿈을 꾸며

풀코스를 뛰었고

잘 못도 틀린 것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출발 전]

훈련은 열심히 했다.

테이퍼링(운동량 줄이기)은 더 잘했다.

카보로딩(몸에 열량축척)은 정말 많이 했다.

그 결과 벌크업이 되었다.

<좌> 마라톤 당일 눈바디 <우> 훈련 중 눈바디

평소 몸무게가 69kg인데 74kg이 돼버렸다.

테이퍼링과 카보로딩이 너무 과했다.

이번 춘천마라톤은 폭망 할 것이라고 직감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기록은 누워버렸다.

발등이 아파서 신발끈을 클러 버렸다.

수분조절에 실패하여 화장실도 갔다.

근육은 언덕에 져서 부들부들 경련이 났다.


그래도 그 상황을 즐기면서 행복하게 뛰었다.

나는 기록을 향해서 레이스를 하였으나

아주 저조한 기록으로 완주했다.


출발할 때는 SUB3를 노렸다.

[SUB3 : 3시간 이내에 완주]

10km를 지나서는 그래도 싱글은 된다고 확신했다.

[싱글 : 3시간 9분 59초 이내에 완주]

하프지점에서는 싱글을 못 할 이유는 없었다.

32km 지점에서는 3시간 15분을 예상했다.

37km 지점에서는 완주를 갈구하면서

억지로 레이스를 이어갔다.

네이버에서 사진을 갖고왔음! ㅜㅜ

10km를 지날 무렵이었다.

호수옆 도로 한편에 사찰로 가는 표지판이 보였고 눈물이 흘렀다.

어머니가 자주 찾던 절이었고

아버지가 살기 위해 기도한 곳이며

내가 위안을 받았던 그곳을

딱 10년 만에 지나는데

마음속에 숨어있던 것들이 떠올랐다.

그중 한 가지만 이야기하겠다.


아버지는 지구별 여행을 마감하기 전에

달리기라는 친구를 소개해줬다.

나는 원래 운동을 좋아했으나 달리기는 싫어했다.

2015년 겨울이 되면서 아버지는 폐렴을 앓았고

몇 개월간 중환자실에 계셨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루에 30분 면회

그것이 전부였다.

멎을 듯한 숨을 힘들게 이어가는 아버지께

미안했다.

그래서 나도 힘들게 숨을 쉬어야겠다고 생각하였고

면회 후 뛰는 것을 반복하였다.

아버지의 입원기간이 길어지면서

달리기 거리도 늘어났다.

2016년이 되어서 아버지는 떠나셨고

나는 풀코스를 뛰었으며

완주메달을 아버지 곁에 두었다.

그리고 지금도 달리고 있다.


2025년 10월 26일

그날 내 달리기는 나의 삶과 같았고

아버지와의 추억과 같았다.

[출발 후 10km까지 : 아빠의 사랑 유년기]

웃음도 여유도 목표도 있었던 레이스였다.

항상 붙어 다니는 삶의 무게도

이때는 별반 느끼지 못했다.

아버지 사랑을 받아 꿈만 갖고 살던 그때 같았다.

몸 어딘가는 불편했지만 곧 풀릴 것이라고 믿었다.

버거움도 있었지만 행복했다.

너무 순식간에 시간은 흘러갔고

나도 흘러가듯 10km를 달렸다.

[10km 이후 하프까지 : 시련의 시작]

12km 부근부터 왼발등이 찌릿하기 시작한다.

뛰는 데는 지장이 없으나 매우 성가신 것이

가난과 같았다.

12살 때 아버지가 쓰러지고 가세는 기울었고

나는 세상을 직시해야 했다.

없음이 삶을 어떻게 하지는 않았지만

너무나 성가셔서 벗어나기 위해 싸웠다.

그때는 진짜 죽으라고 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고작 공부였다.

그래도 아버지의 이름으로 노력했다.

그때와 같이 성가심을 참고 한발 한발 뛰었다.

신매대교(약 21km지점)

[하프 이후 32km, 아버지의 등대였던 20대]

왼발이 찌릿함을 넘어서 힘이 계속 빠졌다.

신매대교 이후 응원도 사라졌다.

오롯이 혼자만의 힘으로 뛰어야 했다.

때로는 외로웠지만 때로는 즐거웠다.

20대 타지에서 어울리지 않는 유니폼을 입고

묵묵히 자리를 지키던 그때가 생각났다.

가끔은 기운이 빠지고 외로웠지만

아버지에게 나는 희망이었고 믿음이었던 시기였다.

자리를 지키듯 러너로써 인내하며 그렇게 뛰었다.

[32km~42.195km 힘들었지만 그리운...]

짝발로 뛰는 것이 한계가 왔다.

반대쪽인 오른발에 대미지가 쌓였다.

속도를 포기하고 왼쪽 신발끈을 클러 버렸다.

잠시 편했지만 곧바로 앞쪽 허벅지에 경련이 왔다.

찌릿함 점점 강해졌고

그 찌릿함은 요의를 불렀다.

다발적으로 문제가 터지는데

그래도 주로에서 뛰고 있음에 감사했다.

나는 30대와 40대 초반은 항상 많은 업무에 시달렸다.

거기에 자주 발생하는 부모님의 병원 입원!

하지만 그저 공부만 했던 어린 시절보다는 행복했다.

왜냐하면 내가 무엇이라도 할 수 있었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와의 이별에서는 아무것도 못 했다.

그래서 아직도 뛰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나는 2025 춘천마라톤을 삶처럼 뛰었고

인생처럼 즐겼다.

그리고 그 감동에 젖어 몇 날을 과거를 돌아보았는데,.

약 40년전 아버지와 나!

어머니가 다닌 절!

그리고 아버지가 살기 위해 기도드린 절!

내가 위안을 받은 그곳이

춘천이 아니고 원주라는 것이 생각났다.

레이스 중 봤던 사원의 입구가

머릿속 잔상과 결합하여

기억을 오염시켰던 것 같다.

하지만 모든 것이 괜찮다고 생각했다.

좋지 않은 기록도

오류로 인한 감정들도

내게는 소중한 2025년 가을로 기억될 것이다.


잘 못하고 틀려서

또 돌이켰고 느꼈으며 새로 간직했다.


인생이란?

단지 그랬을 뿐

꼭 그래야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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