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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서른일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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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를일별진 Apr 21. 2024

연탄 봉사가 가르쳐 준 것

그것은 환멸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 짝꿍이 앉은 자리에서 토를 했다. 토사물과 냄새가 뒤섞여 그 친구의 주변이 엉망이 됐다. 아이들은 소리를 지르며 자리를 피했다. 그 순간의 감정이 기억난다. ‘빨리 안 치우면 내 자리까지 냄새가 배겠는데.’ 성큼성큼 뒤쪽 사물함에서 걸레를 꺼냈다. 친구 옆에서 헛구역을 하지 않기 위해 입으로만 숨을 쉬며 토사물을 닦았다. 얼마 뒤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왔다. 선생님이 본 건 혼자 자리를 치우고 있는 나와 어쩔 줄 모르는 짝꿍이었다. 선생님은 짝꿍을 챙기며 내게는 칭찬을 늘어놓았다. 얼떨결에 나는 친구를 위해 냄새를 참고 자리를 치워준 아이가 됐다. 내 의도와는 관계없었지만, 썩 나쁘지 않은 상황이라 생각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무렵. 나는 봉사부 학생으로 활동을 했다. 희생을 자처하며 친구들과 선생님에게 인정받는 순간을 즐겼다. 한 친구가 전학을 왔다. 지체 장애가 있던 아이였다. 그 아이는 자연스럽게 내 옆자리를 차지했고 나는 불편함 없이 그 친구를 돌봤다. 남자아이다 보니 화장실까지 동행할 순 없었지만, 최소한 흘리는 침을 닦아주고 수업 도구를 챙겨주는 것, 쉬는 시간에 혼자 남지 않게 옆에 있어 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종종 그 아이의 어머니가 학교에 찾아와 내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어린 마음에 (정확히 말할 순 없지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뭔가가 차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희생의 개념이 정의감의 개념으로 바뀌게 된 건.

아이들은 ‘다름’에 관대하지 않았다. 놀림이 시작됐다. 괴롭힘 아닌 괴롭힘이었다. 정의감에 따른 영웅 심리에 빠져있던 나는 그 친구의 기사를 자처하며 남자아이들과 싸워댔다. 친구의 어머니는 학교에 간식을 더 자주 보내왔다. 아들과 잘 지내달라는 간절한 마음이었겠지만 그 마음은 통하지 않았다.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놀림의 방향이 ‘그 친구를 좋아한다’는 소재로 나를 향하자, 더는 착한 척도 영웅인 척도 할 수 없었다. 나도 그들과 다를 바 없었다. 이듬해 학년이 바뀌며 그 친구는 다른 반이 되었고 나는 그가 졸업 전에 특수 교육학교로 전학을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종종 떠오른다. 내 손을 붙잡고 아들과 놀아줘서 고맙다고 말하던 친구의 어머니. 그 손을 맞잡은 나는 어떤 생각을 했던가. 정의감에 불탔던가 아니면 순수하게 기뻤던가. 아니, 이제와 생각해보면 죄책감이었던 거 같다. ‘난 그 정도로 뭔가를 한 적이 없는데’






3월 말이었나 4월 초였나. 막바지 추위가 기승을 부릴 무렵 연탄 봉사를 했다. 첫 경험인 만큼 열심히 하고자 했으나, 봉사가 끝난 뒤 내게 남은 건 환멸이었다.


정의감도 희생정신도 아니었다. 몸을 쓰는 일을 하고 싶었고 이왕이면 도움이 되는 쪽을 고르고 싶었을 뿐이었다. 유기견 봉사, 보육원 방문, 배식 봉사, 장애인 재활 시설 봉사 등 할 수 있는 건 많았지만 조금이라도 사람들과 접점이 생길 것 같은 건 피하고 싶었다. 무의미한 관계 형성이 아닌 노동 그 자체에 중점을 둘 수 있는 활동. 그게 연탄 봉사였다. 진즉 2월에 신청하고자 했으나 그땐 인원 초과로 인해 실패. 한 달을 기다려 참여한 활동이었으니 내 몫은 확실히 다하고 오겠다는 결심으로 참여했다.


사람들이 모였다. 8할은 연탄 봉사가 처음인 걸로 보였다. 당연히 어떤 걸 어떻게 해야 할지 순서도 요령도 알지 못했다. 언뜻 봐도 인원은 50명이 넘어 보였다. 그들을 제외하고 스태프 완장을 착용한 사람들도 제법 보였다. 장갑, 앞치마 등 필요한 물품을 전달받고 착용하는 사이 알음알음 사람들이 무리를 지었다. 내게도 몇몇 이들이 찾아와 말을 걸었지만 최대한 웃으며 대답하되 선은 확실히 그었다.

우리가 옮겨야 하는 연탄은 2000장. 옮기는 장소는 영등포의 쪽방촌. 인원 대비 동선은 한정적이었다. 이렇게 많은 인원이 필요할까 싶을 정도였다. 사람이 많으니 옹기종기 지그재그 모양으로 서서 연탄을 한 장씩 전달하는 방법으로 봉사가 진행됐다. 시작점에서 연탄을 전달하고 중간에서 그걸 옮기고 끝점에서는 흐트러지지 않게 연탄을 쌓는 방식이었으나 수월하지 않았다. ‘다른 곳에서’ 몇 번 봉사를 해 봤다는 사람의 말이 연탄 개수를 세는 과정에 혼선을 준 모양이었다. 핵심은 그들의 경험이 ‘다른 곳’이었다는 것. 잘 오던 연탄이 멈췄고 사람들의 반응은 반반이었다. 웅성거리거나 근처의 사람들과 수다를 떨거나. 일이 진척되지 않아 답답한 건 나였다. 우리가 봉사라는 걸 하는 지역은 실제 주민들이 살고 있는 공간. 최대한 빨리 해야 할 일을 하고 빠져주는 게 나을진대 문제를 해결할 생각은 없이 골목이 떠나가라 웃고 떠들고 있는 걸 보고 있으니 어딘가가 뒤틀리는 기분이 들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스태프 완장을 찬 몇몇이 한데 모여 웃고 있었다. 목에는 무전기가 걸려있었다. 참다 못하고 스태프에게 말을 걸었다.


- 상황 파악을 좀 해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지금 연탄이 안 오잖아요. 연탄 개수 세는 건 어떻게 정리 하실 거예요? 지금 말이 다 달라요.

- 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표정)

- 무전기 갖고 있으시잖아요. 정리 좀 해주세요.

- 이거 어떻게 써요?


안 그래도 스태프 완장을 찬 남자 중 하나가 연탄을 떨어뜨릴 듯 말 듯 장난 치며 넘기던 게 거슬리던 참이었는데... 그 무리에서 들려온 대답이 저러하니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머릿속으로는 참아라, 그들에게 넘겨라, 상황이 어찌 되든 무시하라는 말이 미친 듯이 들려왔지만 당장 중요한 건 문제 해결이었다. 결국 그 중 한 명에게 무전기 작동 방법을 설명했으나, 상황 인지를 제대로 못 한 스태프가 말을 버벅거렸다. 보다못한 내가 무전을 쳤다. 얼마 뒤 단체의 대표로 보이는 사람이 와서 상황을 정리하긴 했지만, 이후에도 문제는 반복됐다.


연탄 봉사를 하는 2시간 남짓 내내, 나는 보이는 걸 보지 않으려 노력해야 했다. 물론 노력하는 자체가 노력이라 한 번 보인 건 계속해서 보였다. 스태프들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인원 배치가 효율적이지 않으니 버벅거림이 멈추질 않았다. 경력자와 무경력자가 의미없이 배치됐다. 상황을 전체적으로 보고 컨트롤 해야할 스태프들은 가장 편안한 지점에 뭉쳐있었다. 노는 사람은 놀고 하는 사람은 했다. “힘드니까 쉬면서 하세요!”라는 말이 들려왔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사람들은 힘든 일을 한 적이 없었다. 애매하게 아는 이들의 말 때문에 혼란이 반복됐다. 단체는 모든 걸 제대로 정리해 주지 못했다. 사람들은 지나가는 주민은 아랑곳 않고 ‘봉사의 이점’ ‘자신의 경험’ ‘연탄 봉사가 얼마나 힘든지’ ‘봉사는 대단한 것’ 등등 과시하듯 온갖 이야기들을 풀어댔다. 봉사는 재미있게 해야 한다며 갑자기 노래를 부르는 사람. 좁은 곳에선 옮기기가 힘들다며 “이 문짝 뜯을까?”라고 말하는 사람. 어차피 많으면 좋은 거니까 연탄 개수의 오차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 내가 보고 있는 게 뭔지, 도대체 봉사란 어떤 건지 혼란스러웠다. 그러던 중 한 남자가 자꾸만 내게 말을 걸었다.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연탄을 옮기다가 한 번씩 불쑥 나서서 상황을 정리한답시고 설쳐대는 내가 눈에 띈 걸까. 그는 주변을 맴돌며 묻지도 않은 말을 반복해서 해댔다. “일 열심히 하는 스타일일 것 같다” “몇 살이냐” “회사에서 깐깐한 사람일 거 같다” 그가 하는 모든 말이 무례하게 들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내 바로 옆에서 거슬리게 뺀질거리던 남자였다. 나는 말했다. “정확하게 맞추셨다! 저랑 같이 일 하셨으면 욕 많이 먹으셨을 듯~” 그는 웃었다. 농담이라 생각했겠지.


집에 가고 싶었다.



봉사가 끝난 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따릉이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데 많은 생각이 들었다. 봉사 활동이라는 게 정녕 ‘즐기기 위해’ ‘즐겁기 위해’ 하는 일일까. 그건 타인의 불행이나 힘듦이 (위치 차이에서 오는) 비교의 행복을 향한 수단이 된다는 걸 증명하는 꼴이 아닌가. 어떤 이는 여기서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얻는 정보가 쏠쏠하다는데. 그 정보가 아무리 필요해도 해야 할 때와 빠져야 할 때는 구분해야 하는 게 아닐까. 이곳의 수장과 관계자들은 왜 책임감 없이 일을 하는가. 누군가에겐 첫 경험일 수 있기에 좋은 기억과 체계로 바람직한 선례를 남기는 게 중요하다는 걸 왜 모르는 걸까. 이 경험이 그들의 이후 봉사에도 영향을 줄 텐데. 적절한 인원 배치와 책임감. 그것만으로도 그날의 연탄 봉사는 버벅거리지 않을 수 있었다. 문제는 명확했고 개선 방향 또한 정확히 보였으니까. 사실 봉사가 끝날 무렵 그곳의 스태프에게 상황을 이야기 했다. 그 이야기가 그들 내부적으로 전달이 됐을지 안 됐을진 모르겠지만, 상관은 없었다. 나의 경우 봉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누군가는 말한다. 봉사 활동을 하러 왔다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은 선하지 않겠냐고. 결국 좋은 사람들이 오는 곳이 이런 곳이 아니겠냐고. 나는 생각했다. 봉사활동을 하러 오는 사람일수록 그 사람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게 중요할 것 같다고. 보여주기 위한 선. 그 위선보다는 차라리 대놓고 표출되는 악이 낫다. 물론 나부터 본질적인 게 ‘선’하진 않았으니 할 말은 없지만. 그날 내가 깨달은 건 타인을 향한 환멸과 봉사 자체에 대한 의구심. 그리고 나를 향한 환멸도 있었다. 순수한 마음의 봉사를 논하기엔 내 과거가 그러하지 않았다. 그 시절엔 영웅심리, 지금은 우월감. 내 마음을 헤집어보면 그 안엔 ‘우월감’이 있었다. 문제점을 찾아내는 나에게 취해있었다. 좋은 마음으로 봉사 활동을 하러 갔지만 결국 다른 것에 빠져버린 것도 나였다. 좋은 점이 아닌 단점만 찾아보며 그들을 욕하기 바빴던 나였다. 회의감이 들었다. 애초에 나는 왜 연탄 봉사를 하고 싶었던 걸까. 이 글의 초반부에 쓴 마음이 과연 진심일까. 그 상황을 불편하다고 느낀 게 나밖에 없었다면 그곳의 불청객은 나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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