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흐려질 뿐
감정의 크기는 변하지 않는다. 갈 곳을 잃었다고 해서 이미 출발했다는 사실이 거짓이 되진 않듯 좋아하는 마음도 그러하다. 줘버린 마음은 어쩔 수 없다. 그걸 자각했던 순간이 거짓은 아니다. 다만 갈 곳을 잃은 마음이란 본디 흐려지게 마련이라, 여전히 좋아하냐 묻는다면 좋아한다 답하지만 중요하냐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고 답하게 된다. 흐려진 마음에 새로움이 선명해지고 흐르는 시간만큼 중요한 게 바뀐다. 좋아하는 마음은 가라앉는다. 아래로, 더 아래로. 절대 사라지진 않지만 묻히긴 한다.
사실 행복해지려고 집을 나섰다. 추억을 쌓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다 길을 잃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행복과 멀어져 있었다.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돌아가고 싶었지만 돌아갈 순 없었다. 너무 멀리 와 버렸다. 포기할 순 없으니 쉬기로 했다. 나무에 기대앉아 주변을 돌아봤다. 멈춰선 곳에선 많은 게 보였다. 걸어왔던 길, 처음의 마음, 지금의 마음. 그리고 내 시야를 가득 채운 새로운 것들과 다양한 가능성. 긴 시간 혼자 쉬고 나서야 알았다. 애초에 중요한 건 길이 아니었다. 과정에서 보고 느낀 모든 것. 내 마음, 그 자체였다. 나는 갈 곳을 잃지 않았다. 단 한 번도 길을 잃은 적 없었던 거다. 나보다 감정이 우선시되지 않도록 재정비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모든 마음 모든 결정 모든 과정에서 중요한 건 나임을 깨닫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함이었다.
흐려지고 가라앉은 감정이 다시 선명하게 떠오를지 아니면 새로움에 밀려 완전히 묻히게 될지, 마음의 결말은 아무도 모른다. 나는 그저, 훌훌 털고 다시 일어설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