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았던 1인
드라마, 종말의 바보 (2024,드라마,한국)
* 이것은 아주 긴 리뷰
내일 죽는다고 해서 오늘이 달라질 게 있을까.
어떤 이의 시선에선 살고자 하는 이가 바보고 어떤 이의 시선에선 포기하는 자가 바보다. 이미 죽음이 정해졌다고 하여, 삶이 아닌 건 아니다. 상실의 슬픔은 여전하고 책임의 무게는 끝까지 누군가의 어깨를 짓누른다. 모든 게 곧 끝난다고 해도 어떤 이는 할 수 있는 것만큼은 해내고 싶다. 배고프면 먹고 울고 싶으면 울고 웃고 싶으면 웃으면서. 그렇게 그저 살았을 뿐이다. 죽음이 오더라도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끝까지 함께”
말이 많은 작품이었다. 넷플릭스 글로벌 9위에 그쳤다더라, 지루하더라, 개연성이 엉망이다, 사생활 이슈가 있는 배우 탓에 몰입이 힘들었다, 온갖 혹평이 난무하는 시리즈였다. 그러나 나의 경우 이 드라마는 ‘호’에 가깝다. 막 좋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게 나빴던 것도 아니었다. 원작의 스토리를 대략 알고 있으니 도파민 폭발하는 디스토피아 장르가 아닐 거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말을 앞둔 인간의 본성을 녹여내기 위해서는 비슷한 클리셰를 벗어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고. 사실 기대를 안 하고 봤다는 게 맞는 표현일 거다. 그런데 웬걸, 생각보다 마음에 남는 게 많다. 전부 있을 수 있는 일, 이해할 수 있는 감정 흐름이었다. 시리즈의 제목이 왜 ‘종말의 바보’인지도 충분히 설명됐다.
물론 어색한 부분도 적지 않았다. 급하게 유아인 분량을 걷어내며 컷이 튀는 부분이 더러 보였다. 중간에 무슨 컷이 더 있었을 것 같은데 ‘뚝’ 끊기는 흐름. 윤상에게 비밀이 있는 것 같은 씬을 굳이 집어넣고선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정확히 해결해 주지 않는 스토리 상의 아쉬움. 분량을 걷어내며 그의 서사를 과감히 버린 게 아닌가 싶긴 하지만, 뒤돌아 생각해 보면 종말을 앞둔 마당에 그의 서사는 중요하지 않지 싶다. 시리즈 속 윤상의 역할은 안전지대에서 한국으로, 다시 한국에서 안전지대로 갈 수 있는 노벨상 수상이 기대됐던 ‘바보’일 뿐이니까. 다만 윤상의 서사가 삭제되면서 세경과의 러브라인에 어색함이 생겼다. (연기 탓은 아니다. 두 사람 모두 연기는 출중했으니까. 그렇다면 문제는 스토리다)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을, 결혼을 약속한 두 사람의 감정이 끈끈해 보이지 않는다. 1년간 서로에게 많은 일이 있었고 생사도 모르고 살다가 극적으로 만났다기엔 그 마음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세경에게 일어난 일. 마음속에 자리 잡은 죄책감과 자신에 대한 두려움이 감정을 막고 있는 건 아닐지 추측하긴 했지만, 백번 이해하려 해도 둘의 마음은 사랑보단 우정에 가까워 보인다.
윤상은 생존 가능성 앞에서 죽음이 예정된 사랑을 택한 바보다. 말인즉슨 윤상이라는 캐릭터에게 가장 중요한 감정은 세경을 향한 사랑이라는 거다. 근데 그 사랑이 힘을 잃으니, 윤상의 매력이 반감되어 버린다. 극 전체를 봤을 때 윤상은 후반부 흐름을 뒤흔드는 키포인트다. 삶과 죽음, 생존 앞에서 ‘바보’가 되는 이들의 주축이 되는 인물이기도 하고. 그런데 그 서사가 힘을 잃으니 자꾸만 어딘가 삐걱거린다.
주연 서사를 제외하고는, 드라마 속 대부분의 감정 흐름이 좋았다. 종말의 바보라는 타이틀도 좋았고. 이들이 바보가 아니면 뭐겠는가. 종말을 앞에 두고 복수전을 펼치고, 사랑을 논하고, 곧 죽는데 담금주를 나누고, 그 와중에도 제 버릇 남 못 주고 도박이니 인신매매니 폭력이니 음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선과 악을 떠나 모든 이들은 바보다. 어차피 죽는 마당에 뭘 하겠다고 그리 애를 쓰는지. 그러나 그 모든 게 현실적이라 생각했다. 비슷한 양상의 장르물을 떠올려보면 폭동의 수준, 범죄의 수준, 악행의 수준이 ‘종말의 바보’와는 완전히 다르다. 웅진시를 무너뜨린 가장 큰 원흉은 군인들의 폭동. 교도소에서 탈출한 이들의 만행, 인신매매, 유흥가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악행, 도박. 마트를 털어봤자 한국인 습성 어디 안 갔다. 클리셰 속 마트 털이는 거의 전쟁에 가까운데 종말의 바보들은 딱 적당히 털고 이후엔 사이좋게 나눠 먹었다. 돈 있는 자들은 이미 한국을 떠난 지 오래고 남은 이들은 탈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약탈이 아닌, 사이비와 종교를 활용한 횡령 수준으로 나름의 애를 썼다. (물론 최악의 악으로 미성년자를 대상으로한 인신매매가 주요 사건으로 다뤄지고 있긴 하다) 지속적으로 나오는 디-데이가 아니면 그들에게 곧 종말이 가까워오고 있다는 게 실감나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연출이나 많은 인물 탓, 하나의 감정 라인을 따를 수 없다는 것도 그다지 불편하진 않았다. 오히려 그래서 종말 앞의 사람들을 제 3자로서 지켜볼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소행성 충돌은 어차피 예정된 일이며, 죽음을 기다리는 이들이 한 사람은 아니니 감정이 다양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모든 인물은 신을 믿는다. 혹은 신을 믿지 않아도 성당을 주축으로 교류한다. 굳이 성당을 메인 장소로 정한 데엔 이유가 있을 거다. 신부의 (굳이 좋게 포장해) 인간적인 면모를 사건의 하나로 잡은 데에도 의도가 있을 거고. 신에게 기도하고 신에게 감사하고 신에게 진심을 토로하던 이들이 서로를 바라본다. 하늘이 아닌, 눈 앞의 이들에게 마음을 전한다. 신이 무언가를 해주길 바라는 게 아니라 직접 행동하며 남은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간다. 종말을 앞두고 나서야.
나는 세경을 이해했다. 누구보다도 따뜻했던 (훗날 윤상의 말에 의하면, 씩씩한 줄 알았으나 씩씩하지 않았던) 세경이 사람을 죽였다. 한 번은 죽이려 했고 한 번은 진짜 죽였다. 학생들을 잃었다. 눈앞에서 그 장면을 목격했고 그 날의 무력감은 죄책감이 되어 세경을 짓눌렀다. 죽은 줄 알았던 연인, 윤상이 돌아왔다. 마냥 기뻐할 수 없다. 자신은 예전과 다르다. 사랑이 중요했던 시절이 까마득하다. 연인을 향한 사랑보다 남은 아이들을 향한 사랑과 책임이 더 크다. 세경은 결국 마지막 선택을 했다. 어쩌면 그건 자신을 위한 선택이었을 거다. 내가 세경이었다 해도 같은 선택을 했지 싶다. 죽음이 예정되어 있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걸 하지 않을 순 없지 않겠나. 지킬 수 있는 걸 지키지 않을 이유는 없다. 소행성 충돌로 죽는 것과 지켜지지 못하고 인간에 의해 죽는 건 다른 이야기다. 지킬 수 있다면 ‘어차피 죽을 목숨’ 기꺼이 세경과 같은 선택을 했을 거다. 그렇다. 정말 바보다. 종말을 앞에 두고, 아니 종말을 앞에 뒀기 때문에 사람들은 바보가 된다.
그런 의미로 윤상의 캐릭터가 가장 좋았던 건 마지막 장면이었다. 사랑 앞의 바보는 마지막까지 그녀를 지키기 위해 달려간다. 그 또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했다.
신념이라는 것이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 사랑이라는 것이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 가족이라는 것, 우정이라는 것이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 원작은 소행성이 충돌하고 살아남은 몇몇 이들이 뒤를 돌아보는 데에서 끝이 난다고 한다. ‘종말의 바보’에서도 소행성은 한반도에 떨어졌을 거다. 살아남은 이들은 어떻게든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세경과 윤상을 포함, 웅진시 사람들은 결국 죽음을 맞이했을 거다. 바보처럼, 살 생각을 못하고. 그러나 바보처럼, 부끄러움을 모르고 자신에게 떳떳하게. 소중한 것을 마음에 품은 채로. “끝까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