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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관우 Jun 05. 2022

미혼과 결혼사이

이혼, 이런 이야기는 방송에서 꺼내면 안 되는 시절도 있었다. 모두가 공감하고 모두가 격정 하며 봤던 <사랑과 전쟁>은 아주 늦은 심야 시간에 편성되었던 걸 생각해 보면. 그런거 치곤 드라마에선 늘 다루던 소재였다. 만들어낸 허구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파혼, 혹은 이혼 이후의 상황을 보여준 적은 있었지만 이혼의 현재 진행형을 관찰카메라로 보여주는 형식은 최초인 듯하다. 이혼을 빗대어 말하지 않고 직접 이야기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젠 이혼이 흉이라고 누구도 말할 수 없게끔. 


우리 이혼했어요

그리고 결혼과 이혼 사이


관찰카메라의 일부는 각자의 지난 경험을 토대로 재구성된 연출 상황임을 짐작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과감했다. 더구나 방송 심의를 비껴가는 티빙의 <결혼과 이혼 사이>는 더더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을 상처를 방송에 내보이는 출연자들의 용기 혹은 무모함에 감탄하면서도 그들의 고통을 보며 나는, 우리는 좀 더 괜찮은 사람이구나 안심하며 느끼는 날카로운 위로라니. 이 프로그램에서 느끼는 감정을 재미 말고 다르게 불러주고 싶은데 딱히 생각나는 표현이 없다.


요즘 부쩍 많은 콘텐츠에 소재가 되기도 하는 ‘가스라이팅’이란 게 이런 거구나를 새삼 느끼게 되기는 한다. 이혼의 정당화. 내가 이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려면 상대의 과실을 입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피해자는 나여야 한다. 교통사고처럼 10:0의 일방적인 책임은 아닐지언정 8:2, 7:3 정도의 책임은 물을 수 있어야지 '누가 5야?' 라고 팽팽해지는 순간, 그 부부의 구성 여부는 본인들이 결정할 수 없는 상황으로 흘러가게 된다. 사고를 입증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게 바로 가스라이팅이다. ‘선생님, 제 신호에서 진행하고 있는데 끼어드셨잖아요, 그럼 과실은 선생님이 무셔야죠.’, ‘아니죠, 제 입장에선 제 차선 물고 잘 가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합류 지점에서 속도를 안 줄이셨잖아요. 방어운전도 모릅니까?’ 그 끔찍한 시간을 보낸 이들이 부디 반드시 행복하길 바란다. 


<저 결혼을 어떻게 말리지?> 라는 미혼 주제에 결혼을 주제로 한 에세이를 썼을 때, 물론 걱정되는 부분들이 있었다. 경험해 보지 않은 소재를 글로 쓰는 것 만큼 무모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책 제목에 ‘결혼’이란 단어가 들어가는 순간 그 부분은 감내하기로 했다. 책을 다 읽어본 사람이라면 내 무모한 결정을 이해해 줄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내가 썼던 에세이는 결혼이란 뭘까 여전히 두려워하고 다가가기 어려운 지금의 상태 그대로를 담고 있다. 그저 나 같은 사람들끼리 더 치열하게 각자의 생각을 이야기하며 자신들의 결정에 따라 후회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 내가 그랬으면 하는 마음 그뿐이지 비혼 혹은 결혼을 찬양, 추앙할 생각은 없었고 없다.


추앙이라니. 과연 드라마 대사로 쓰일 수 있는 말인가. 그 드라마를 보고는 있지만 여전히 너무 갔단 생각은 있지만 이 말을 양지로 꺼내온 것만으로도 이미 역할을 다 했을뿐더러 훌륭한 대사가 되었다고 본다. 추앙이라는 말처럼 내 인생에도 한 번을 떠올리지 못했던 누군가가 일상이 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지금 노트북을 덮고 들어가야 할 

혼자 사는 불 꺼진 집이 싫기는 하다.


미혼과 결혼 사이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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