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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틸킴 May 23. 2021

우리는 그물처럼 자란다

[야간] 어쩌다 02호

[야간] 어쩌다는, 작가가 어쩌다 갖게 된 인사이트를 나누고자 어쩌다 밤 중에 올리는 글입니다.



난 왜 이렇게 늦지. 남들 다 하는 일인데, 왜 난 이 모양이지?


가끔 이런 생각이  때가 있습니다. 모두가 사다리를 타고 높이 높이 올라가는데, 나는 계단   오르는 것조차 벅차하지는 않나. 혹시  앞에는 사다리가 없는  아닐까.


남들보다 비관적인 사람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다리식 성장관'은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갖게 되는 사고방식인지도 모릅니다. 각종 육아서적과 구전된 육아지식으로 무장한 부모님의 마음속에 처음으로 이런 의심이 싹튼 날.


"이상하다, 배밀이할 때가 된 것 같은데..."

"땡땡이네는 벌써 뒤집기 했다던데..."

"왜 아직도 옹알이 하나 없이 조용하지?"

"뭔가 잘못된 게 아닐까? 내가 잘못 키운 거 아닐까?"


바로 그 날부터, 우리는 성장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가져온 것일지도 모릅니다.


모두의 성장이 같은 순서로 이뤄진다는 생각.

세상 아이가 자라는 방식에 단 하나의 발달 사다리는 없는데도 말이죠.



| 아동 발달의 수수께끼


"왜 보행 반사는 갑자기 사라졌다가, 갑자기 나타날까?"


갓난아기를 돌본 경험이 있는 분이라면 보셨을 겁니다. 아기의 발바닥 땅에 닿게 하면 마치 걷는 것처럼 들썩거리는 모습을. 바로 이것이 보행 반사입니다.  반사적인 걸음마는 인간에게 보행의 본능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보행 반사가 생후 2개월이 지나면 갑자기 사라진다는 것을 아시나요? 그러다 '진짜' 걸음마를 시작할 때쯤 다시 나타나는데, 바로 이것이 1930년대부터 1980년대 유아 발달 연구자들에게는  미스터리였습니다. 도대체  신비한 반사 작용은  갑자기 사라지는 걸까요? 게다가  또다시 나타날까요?


이 비밀을 풀기 위해 당시 과학자들은 수많은 아기들의 발달 상태를 추적했습니다. 아기들마다 보행 반응이 나타났다 사라진 월령을 모두 더한 후, 아기들의 숫자로 나누어 평균 월령을 도출해냈죠. 그리고 그 시기에 나타나는 다른 발달 상의 지표들과 비교를 해보았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보행 반사가 나타났다 사라지는 바로 그 시기에! 발달 지표 하나가 정확히 겹쳤습니다. 그것은 '미엘린 수초'가 형성되는 시기였습니다.


이미지 출처) https://url.kr/zholtp


미엘린은 인간의 신경계를 구성하는 중요한 물질입니다. 미엘린은 신경 신호들을 샐 틈 없이 포착해 전달하는데요, 미엘린이 성장하면 그 전달 속도가 수십 배로 증폭합니다. 미엘린의 성장과 함께 인간의 신경계는 더욱 세밀해지고 움직임도 정교해집니다. 과학자들이 계산해 낸 데이터에서는 이런 미엘린의 형성시기와 보행 반사가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였습니다, 평균적으로.


평균값 속의 아기들은 미엘린 형성을 시작하면 반사 반응이 사라지고, 미엘린이 발달함에 따라 뇌의 운동 제어센터가 발달해 마침내 운동 동작들을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았습니다. 이 과정과 함께, 사라졌던 보행 반사 반응이 다시 나타나는 것이라고 당시의 과학자들은 믿었습니다. 이 믿음이 어찌나 확고했든지, 1960년대에는 의학계의 표준이 되었다고 합니다. "보행 반사가 제때 사라지지 않는 아기는 신경 장애가 있을지 모른다"라고 부모들에게 주의를 줄 정도로요.


그러나, 정말 그랬을까요?


보행 반사가 사라지지 않는 아이들은 정말 신경 장애의 확률이 높았을까요?



| 바보야, 문제는 포동포동한 허벅지야


소아 의학계에 만연한 이 이론에 의문을 제기한 것은 에스터 텔렌이라는 과학자였습니다. 에스터는 일찍이 동물들의 본능에 대해 연구했는데, 고정 불변이라고 알려진 여러 가지 본능들이 사실은 개개 동물에 따라 아주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같은 원숭이라도 개별 원숭이 고유의 특성에 따라 어떤 본능은 발현되기도 하고, 또 다른 본능은 억제되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개개인성'에 따라 그녀는 보행 반사를 다시 검토해보기로 했습니다.


에스터 텔렌은 아기들의 평균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미 동물에 대한 생물학자들의 판단 미스를 보았으니까요. 그녀는 40명의 아이들을 2년 동안 개별적으로 추적했습니다. 매일 각 아기들의 사진을 찍어 개인별 신체 발달을 검토하고, 다양한 움직임 실험들을 했습니다. 그렇게 밝혀진 이유는, 충격적으로 귀엽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기들의 포동포동한 허벅지 때문이었습니다.


조사 기간 동안 체중 증가가 유독 빨랐던 아이들은 보행 반사도 그만큼 빨리 사라졌습니다. 한편, 체중이 더디게 증가한 아이들은 훨씬 더 오랜 기간 동안 보행 반사를 유지했습니다. 모든 인과관계가 명확해지는군요. 허벅지 '근육'이 통통해지는 허벅지의 '무게'를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기서 심장이 멎었습니다.) 아기들이 자라는 과정 속에서 어느 순간 체지방의 성장이 근육의 성장을 추월하는 시기가 발생해 다리를 들어 올리지 못했다가, 다시 근육의 성장이 체지방의 성장을 따라잡으면 다리를 들어 올리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보행 반사가 사라진 아이들의 하반신을 물에 넣으면, 다시 보행 반사를 보인다는 점을 통해서 더 확실해졌습니다.


에스터 텔렌의 이 연구는 1984년에 발표되었습니다.

미엘린 수초에 관한 잘못된 이론이 성립된 1960년대로부터 근 30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긴 세월 동안 본질을 보지 못한 채

전혀 엉뚱한 부분을 완전히 문제라고 착각하며 고통받았던 것입니다.


아동 발달사에는 이런 예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 아기들은 어떻게 걷게 될까?


보행 반사의 비밀을 밝혀낸 에스터 텔린의 제자, 캐런 아돌프 역시 아동들의 움직임을 연구했습니다. 그녀는 아기들의 '걷기 경로' 대해 특히 관심이 많았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아기가 태어나면 목을 가누고, 뒤집고, 배밀이를 하고, 앉고, 기고, - 대체로 이런 순서에 따라 마침내 걷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캐런 아돌프의 연구 결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28명의 아기들이 걸음마를 떼는 날까지의 경로를 추적했는데, 그중 정상적인 경로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28명의 아기들에게서 발견된 걷기 경로는 무려 25가지에 달했습니다. 어떤 아기들은 일부 단계를 아예 건너뛰기도 했고, 여러 단계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일종의 퇴행 현상처럼 보이는 단계를 거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기들은 독자적인 동작 패턴을 바탕으로 종국에는 모두 '걷는 데 성공'했습니다.


심지어 기는 것도 걷기의 필수 조건은 아닙니다. 이번엔 데이비드 트레이서라는 인류학자의 발견입니다. 그는 파푸아 뉴기니의 원주민 오족을 연구하다 이상한 사실을 하나 눈치챕니다.


이 마을의 아기들은... 한 명도 기지 않는다!


가만히 살펴보니 오족의 아이들은 기는 것 대신 ‘엉덩이 끌기 단계’를 거쳤습니다. 오족의 부모들은 아이가 엎드려 눕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비위생적인 바닥에 오래 접촉하면, 치명적인 병에 걸리거나 기생충에 노출될 위험이 높아졌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기는 단계'는 사실 문화적 산물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기는 과정을 거치는 건 우리의 환경이 '그래도 되기' 때문에 촉발된 것이지, 그 자체가 필수적 단계여서는 아니라는 거죠.


모든 아기는 몸 움직이기 문제를 저마다 독자적인 방식으로 풀어갑니다.
-캐런 아돌프



초등 입학 전에 배울 것, 중학생 필독 고전 명작. 나이를 먹을수록 늘어나는, 나이에 값하는 온갖 일들.


우리는 언제나 삶에 정상적인 경로가 있다고 배워왔습니다. 연령별로 배워야 하는 지식들과 해야 하는 활동들은 모두 정해져 있고, 시험을 통해 학습의 정도를 측정했습니다.  경로에서 연령 평균보다 우수하게 달성하면 지능이 뛰어나다고 칭찬받았고,  경로에서 이탈하면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으로 평가받았습니다. 자아가 형성되는 시기 내내, 평균 점수를 확인하고, 같은 학년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는데 골몰하며 자란 아이들은 커서도  하나의 성장 경로가 있으리란 압박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 모두가 다르듯이 저마다의 성장 경로도 다른  '정상'이라면 우리는 도대체 무엇에 시달려온 걸까요?


우리가 성장하는 방식이 모두가 다르다면, 무엇을 남들보다 먼저 해냈다는 사실이  우월하다는 증표가 될까요?  혹은  아이가 조금 느린  같다고 해서 불안해할 필요가 있을까요? 아직  개개인성에 맞는 정확한 경로를 찾지 못했을 ,  나름으로 성장법을 찾고 있는 중인데 말입니다.


인간의 발달에 관한 , 과학자들은 평균을 통해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습니다. 평균은 수많은 개체들을 더해 나눈 값이지만, 놀랍게도 개체의 특성을 반영하지는 못합니다. 언어 능력 2, 수학 능력 8 영희도, 언어 능력 8, 수학 능력 2 철수도 평균은 똑같이 5점입니다.  5점에는 누구의 특성도 반영이 되지 못합니다. 어떤 아이들은 기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걷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보행 반사가 아주 천천히 사라집니다.  둘은 평균의 세계에선 비정상 경로이지만, 사실은 모두 정상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의 사다리가 아니라,  넓은 바다를 향해 가는 저마다의 강물입니다. 우리의 성장은 직선처럼 쉽고 간편한 구조가 아니라 복잡하고도 성긴 그물망입니다.


발달의 사다리는 없다. 사다리라기보다는, 우리 각자가 저마다 발달의 그물망을 가지고 있다. 이는 각각의 새로운 단계마다 우리 자신의 개개인성에 따라 새로운 가능성이 온갖 다양한 형태로 펼쳐진다는 얘기다.

<평균의 종말>


세상모르고 잠자는 아기의 통통한 허벅지에 인생을 걸고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통통한 허벅지에서 발견한 비밀은 아기의 체온만큼 따스합니다. 너는 누구나와 같은 방식으로 자라날  없으며, 너에겐 너에게 맞는 그물망이 있다고.  앞에는 모두와 두고 경쟁해야 하는  하나의 사다리가 아니라,   먼바다를 향해 펼쳐진 그물망이 드리워져 있다고. 그러니   앞에 남들과 비교하며 혼자 자책하지 말라고. 다른 사람들이 너를 익명의 수치로 묶어 멋대로 판단하게 두지 말라고.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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