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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틸킴 May 30. 2018

나를 사랑하는 게 더 힘든 우리들

<CALL ME BY YOUR NAME>

시작은 89살 노인이었다. 요즘 핫한 퀴어 영화의 각본을 89살 노인이 맡았다. 아카데미상도 받았다. 모든 노인이 그런 건 아니지만 세상을 오래 산 어떤 이들은, 어린 것들은 도무지 볼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것들을 해낸다. 그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말했을까. 아, 영화 포스터도 시원하네. 읽지도 않은 원작 소설은 표지가 예뻤다. 그러니까 영화의 첫인상이 다 좋았다. 


아, 사랑 얘기다. 이것은 사랑 얘기다. 동성애 영화니까. 동성애 영화 리뷰 중엔 ‘이것은 그저 동성애 영화가 아니라 사랑 영화였다’는 말이 참 많다. 동성애는 동성 간의 사랑이다. 그러니 어떤 동성애 영화도 동성애 영화로만 규정될 수 없다. 동성애는 사랑의 한 형태니까. 모든 동성애 영화는 사랑 영화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 그래서 흔한 저 문장은 마치 황급한 변명 같다. 동성애에 대한 어떤 입장을 감추고 싶은 것처럼. 


<Call me by your name>은 부정할 수 없이 동성애 영화다. 동성애 영화만이 이뤄낼 수 있는 것들을 아름답게 이뤄낸다. 어른의 문턱에 있는 소년. 그의 세계에 어느 날 사랑방 손님이 나타난다. 잘 생기고, 몸도 좋은. 소년은 남자에게 반한다. 그런데 남자는 인기가 너무 많다. 여기저기 안 끼는 데가 없다. 소년도 인기가 없진 않다. 그래서 여자 친구를 만들어본다. 약간은 복수하는 마음. 그녀와의 첫 섹스. 이건 뭐지. 생각보다 너무 좋잖아. 어,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그 남자와도 관계가 급진전된다. 그와 다시 첫 섹스를 하고, 소년은 생각에 잠긴다.



하얗고 탐스러운 복숭아. 소년의 긴 손가락이 복숭아를 헤집는다. 과즙이 흐른다. 망가진다. 소년은 그걸로 자위를 한다. 그걸 사랑하는 남자에게 들킨다. 이 영화의 가장 상징적인 장면. ‘남자와의 첫 섹스 후, 소년이 복숭아로 자위를 한다.’ 주로 여성을 상징하는 복숭아. 소년의 흥분이 남아있는 복숭아를 들어 보이는 남자 애인. 소년은 지금 남자와의 사랑이 무엇인지 그 육체적 의미를 실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혼란스러움, 그 깨질 듯함. 소년 엘리오는 지금 모든 의미에서 경계에 서있다. 그는 영어와 이탈리아어, 두 가지 말을 유창하게 쓰는 동네 유일 유대인이며, 어른이 되기 직전이다. 그리고 이제 막 사랑을 시작했다. 


경계에 서있는 한 소년. 내 생각에 각색을 맡은 노인에겐 이 이미지가 가장 중요했다. 그는 러브 스토리엔 관심이 없었다. 영화의 장면들은 스토리 전달이 아니라 감정 전달을 위해 구성되어 있다. 이 영화는 머리로 이해되기 전에, 육체적으로 느껴진다. 눈으로, 귀로, 피부로. 그래서 그 어느 영화보다 이미지적이고, 관능적이다. 우리는 엘리오의 가장 가까운 관찰자로서 그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사실, 동성애자도 이성애자도 적어도 한 지점에선 똑같다. 그 결과가 어쨌든, 모두 언젠가 사랑을 시작했던 사람들이란 것. 그래서 이성애자들도 이해할 수 있다. 엘리오의 감정을. 그것을 꼭 이성애자의 상황에 1:1 대입해, ‘사랑 영화’라고 말하며 ‘동성애’라는 글자를 가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그건 저마다의 입장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사랑은 입장이 다른 두 사람이 하는 일이다. 물론, 다자 연애가 아닐 경우지만. 사랑의 참가자들은 언제나 입장이 다르다. 남자라서, 여자라서. 학생이라서, 선생이라서. 좋은 부모 밑에 태어나서, 아니어서. 입장이 다른 서로가 만나 사랑에 빠진다. 입장이 달라 다시 헤어진다. 아무리 당신을 사랑해도,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당신이 될 수 없다. 우리는 끝내 타인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은 ‘이해하는’ 정도다. 나와 당신의 세계는 아무리 겹쳐도 여집합이 생긴다. 


영화에는 올리버가 속한 세계는 거의 표현되지 않는다. 오로지 엘리오의 세계만이 있다. 엘리오는 혼자서 올리버의 마음을 상상했다가 상처받고, 그를 미워했다가 여전히 그에게 빠져드는 자신에 또 지쳐한다. 엘리오는 온전히 그의 입장 안에 있다. 그때 올리버가 엘리오에게 부탁한다.  


Call me by your name 

네 이름으로 나를 불러줘 


네 이름으로 나를 불러달라는 요청. 내 이름으로 감히 당신을 불러보는 것. 어쩌면 사랑을 할 때 가장 어려운 부분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사랑하는 바로 그 사람이 나를 더 보잘 것 없게 만드니까. 당신은 모든 게 능숙하고, 여유롭고, 멋지고 또 아름답다. 그랬기에 사랑은 시작됐다. 내가 잠 못 이루는 밤에 당신은 이미 곯아떨어져있을 것 같고, 당신이 기억도 못하는 한마디는 나를 전전긍긍하게 한다. 도대체 이런 나를 당신은 왜 사랑할까. 나는 이렇게 못났고, 찌질한데. 


내가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다정함으로 내 이름을 부를 수 있다면. 당신을 바라보는 바로 그 눈빛으로 내가 나 자신을 그렇게 사랑할 수 있다면. 사랑은 내 중심을 당신에게 양보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나 자신을 사랑해야 하는 일이다. 나를 사랑하는 당신을 믿어보는 일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당신을 보며, 사실은 그 눈에 담긴 우리를 본다. 당신의 눈빛에 담긴 내가 지금 이대로 완전하다고 믿어본다. 사랑은 입장이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잠시 같은 입장에 처해있다고 상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영화의 끝에 소년은 울게 된다. 입장 차이는 분명하다. 엘리오에게 올리버만의 멋짐이 없듯, 올리버는 엘리오에게 허락된 대부분의 것을 갖지 못했다. 게이 아들에게 멋진 말을 해주는 부모가 없고, 의식해야 하는 눈빛들이 있다. 그 앞에서 그는 엘리오를 감당하지 못한다. 그는 다시 약혼을 앞둔 인기남으로 돌아간다. 올리버는 엘리오가, 엘리오는 올리버가 될 수 없었다.  


이별의 끝은 언제나 입장의 확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시 사랑에 빠진다. 내가 얼마나 하찮은지, 당신은 얼마나 빛나는지 그 앞에서 너절해져 가며, 서로 다른 입장을 실감하며 또 사랑에 빠진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벽난로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운다.   


2가 되지 못한 1들에게, 이 노인은 그 한 장면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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