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국사, 세계사 과목을 제일 싫어했다. 과목이 싫어서 선생님이 싫었는지, 아님 그 반대였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외울 것도 많고 선생님도 맘에 안 든 역사 과목은 중고등학교 내내 기피 과목 1호였고, 성적도 제일 안 좋았다. 중학교 때 국사를 너무나 잘했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수학, 과학과목을 싫어하는, 나와 정 반대인 아이였다. 어떻게 그렇게 국사를 잘하냐는 내 질문에 그 친구의 논리가 신선해서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다.
‘국사는 이해과목이야. 과학이야 말로 암기과목이지. 문제를 풀 때, 과학책은 뒤지면 답이 나오지만 국사는 그렇지 않으니까. 국사는 잘하려면 이해를 해야 해. 그래야 재밌고 오래 기억에도 남고 문제도 잘 풀 수 있어.’
난 역사를 전반적으로 이해를 못 했었나 보다. 그 뒤로도 국사는 여전히 재미도 없고 잘하지도 못하는 과목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내가 이과를 선택했던 덕분에 그게 크게 중요하지 않았고 그렇게 국사는 싫은 과목으로 남은 채 학교를 졸업한 후 잊혀 갔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뭐가 먼저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우연히 박시백 작가의 조선왕조 실록에 대해서 얘기하는 팟캐스트를 접하게 되었다. 조선의 역사를 조선왕조 실록을 바탕으로 왕을 중심으로 풀어낸 이 20권의 만화책을 홍보하기 위해 시작된 팟캐스트였는데, 역사를 싫어했던 나로서는 왜 그걸 듣기 시작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이런 내가 듣기에도 너무 내용이 재미있었고, 그래서 빠지지 않고 계속해서 챙겨 들었다. 결국 20권 전체 만화책도 다 살 정도였다. 그즈음이었던 거 같다. 우연히 궁 해설을 하는 궁궐 길라잡이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았던 게.
궁궐 길라잡이는 서울의 5개 궁을 해설하는 자원봉사 단체로서 매년 궁 해설자를 모집한다. 여기에 지원을 하게 되면, 1년 동안 교육을 받으며 해설자가 되기 준비를 한다. 조선의 왕과 궁궐을 포함한 기본적인 역사와 5대 궁에 관해 이론 수업도 듣고 실제 궁에 들어가서 답사도 한다. 그중에 해설을 하고 싶은 궁을 선택하여 해설 준비를 본격적으로 하게 되는데, 지원한 궁의 선배 해설을 여러 번 들어 보는 것과 나만의 해설 매뉴얼을 작성하여 담당 선배에게 확인을 받아야 하며, 최종적으로 여러 명의 선배들 앞에서 먼저 시연을 하여 자격을 인정받아야만 일반 시민에게 해설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회사가 끝난 후, 교육 장소로 와서 7-10시 동안 하는 역사 수업을 들었다. 회사일과는 너무나 성격이 다른, 그것도 내가 그동안 극도로 싫어했던 역사 과목 수업을 듣고 있는 스스로가 신기했다. 역사 전공 교수님이나 관련 전문가분의 살아있는 생생한 강의를 듣는 게 재미있기까지 했다. 어렸을 때 시험을 위해 억지로 공부하며 용어를 외워야 했던 지겨운 공부가 아니니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 걸 듣는다고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나중에 해설을 한다고 해설비를 받는 것도 아니고, 단지 내가 좋아서 듣는 수업이었고, 그래서 거의 빠지지 않고 들을 수 있었다.(팟캐스트와 병행해서 들으니 다각도로 이해할 수 있었고, 나중엔 한국사 능력 시험도 준비하면서 EBS 최태성 선생님 수업도 들으니 더욱 의미 있고 생각해 볼거리가 많은 역사 공부가 되었다.)
이론 수업을 들으며 꽃피는 봄에 여러 궁을 답사하고, 해설 매뉴얼을 작성하고, 궁 구석구석을 지나다니며 열심히 해설 매뉴얼을 외웠던 더운 여름을 지나, 시연을 통과한 후 드디어 일반 시민 해설을 시작했다.
일요일 10시-3시 사이에 30분마다 있는 해설 중 한 타임을 선택해서 하는 해설은 기본 10여 명, 많게는 2-30여 명의 시민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해설해야 한다. 초짜인 나로서는 할 때마다 매번 너무 떨리고, 긴장의 연속이다. 한 달의 한번 해설을 하기 때문에 할 때마다 매번 새롭고, 혹시나 설명해야 할 말을 빼먹지는 않을지, 용어가 갑자기 생각나지는 않을지 끝까지 긴장을 풀 수 없다. 해설한 지 두세 달 지났을 무렵 경복궁 홈페이지에 내 해설을 듣고 어떤 분이 후기를 남겨주셨는데 내용은 평범했지만 내 이름을 언급하며 감사의 마음을 표현해 주셨다. 처음 해설을 시작한 나에게 엄청난 자신감과 뿌듯함을 주었던 그 후기를 아직도 기억한다.
교육 1년, 해설사 활동 1년을 끝으로 해설을 쉰 지 만 8년이 지난 지금 난, 다시 해설을 준비 중이다. 올해 2학년이 된 아이를 임신했을 때, 그만두었고, 아이를 낳고 키우느라, 그리고 수원으로 이전한 회사를 따라 집도 서울에서 수원으로 옮기느라 그동안 다시 해설을 마음먹기까지 이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더 늦으면 영영 못할 거 같아서 올해 용기를 내어 결심했고, 지금 실행에 옮기는 중이다. 지난달에 해설 준비를 위해 궁에 들어갔더니 지금까지도 꾸준히 해설하시는 분들이 반갑게 날 기억하고 맞아주셔서 더더욱 용기를 낼 수 있었다. 20년이상 해설활동을 하고 있는 선배들을 보며, 나도 나중에 회사는 그만두게 되어도 궁궐 해설은 늦은 나이가 되어서까지 뿌듯한 취미로서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활동기간에 비해 너무 오래 쉰 탓에 처음부터 다시 준비하고 있다. 8년 동안 복원되고 달라진 궁 상황에 맞게 매뉴얼 작성부터 다시 하였고, 선배들의 해설 참관도 여러 번 했다. 4월 중에 시연만 통과하면 5월부터 본격적으로 일반 시민 해설을 할 수 있다. 바쁜 4월이 되겠지만 무사히 이 시기를 넘겨 즐겁게 해설을 다시 시작하고 싶다. 기대되고 설렌다.
아래 질문에 대한 답이 궁금하신 분은 언제든지 궁에 오셔서 무료 해설을 들으시고 답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꽃피는 봄이 궁궐을 방문할 가장 좋은 시기입니다.
1. 조선시대 궁궐이 서울에 5개나 있는 이유
2. ‘양반’, ‘흥청망청’이란 말의 유래
3. 앙부일구(해시계) 보는 법
4. 집현전 위치
5. 에디슨 회사에 직접 편지를 보내 최초의 전깃불 설치를 요청한 사람과 최초로 전깃불이 설치된 장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