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터면 수학과외선생님
입사하고 4~5년쯤 지나서 고등학교 친구가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만나러 갔다.
인지도가 없는 대학교가 마음에 안 들어 편입을 해서 이름이 알려진 학교의 호텔관광학부를 선택했지만 유학파가 아니면, 그리고 날씬하고 얼굴이 예쁘지 않으면 취업이 어렵다는 선배들의 말을 듣고는 전공을 살리는 건 깨끗이 포기하고 영어 과외로 방향을 틀어 아예 직업으로 과외를 하고 있는 친구였다.
4~5명이 모였는데, 다들 고만고만한데 비해 이 친구만 과외 덕분에 한 달 수입이 우리와 확연히 다름을 알게 됐다. 세금도 내지 않고 시간도 무척 자유로워 보이는 이 친구의 이야기를 다들 부러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들었다. 이런저런 결혼 준비과정이나 그동안 살아온 얘기를 하다가 신혼집 얘기를 하는데 예비 신랑이 돈이 없어서 살 집을 구하느라 빚을 좀 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돈이 7~8천 모이니까 저금만 하기도 그런 거 같아서 작은 집 하나 사놓은 건 있어. 근데 거긴 들어갈 수가 없어서 빛 조금 내서 당장 살 집 하나 얻었어.’
헉…그 당시 내 수중에는 몇 년 동안 일하면서 모은 돈을 다 합해도 3천만 원도 채 안 되는 거 같은데 2억 가까이하는 집을 샀다고? 와…
나와 차원이 다른 수입과 재산 규모를 알고 나니 입이 딱 벌어졌다. 8시간 꼬박 일하면서 야근도 자주 하면서도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월급을 받는 나 자신이 친구와 비교해 보니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풀이 죽어 있을 때, 친구가 나에게 오더니 제안을 한다.
‘너도 과외할래? 너는 수학 과외 해서 나랑 같이 팀으로 하면 딱 이겠다. 팀으로 하면서 서로 필요한 학생 소개해 주면 훨씬 의뢰도 많이 들어오고 좋을 거 같아. 그동안 학부모들이 나한테 수학 선생님 소개해 달라고 많이 물어보았거든. 그래서 수학 선생님 한 명 정해서 같이 하려고 생각 중이었어. 회사 그만두고 딱 1년만 시간 투자해서 애들 좀 모이면 그다음부턴 수월하니까 진짜 한번 생각해 봐.'
아.. 나도 과외를 직업적으로 해볼까. 그럼 지금보다 훨씬 돈도 많이 벌고 시간도 자유롭고 너무 좋을 거 같았다… 정말 나도 한번 해보고 싶었다.
내가 관심을 보이자 친구는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아이들을 모을 수 있는지, 홍보하는 방법에서부터 과외비를 받는 팁, 부모님 공략 노하우 등등. 당장 일을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구체적이고 세세한 방법들이었다. 한 달에 8번만 하면 나머지 남는 날은 자유롭게 시간을 쓸 수 있고 성적만 오르면 엄마들이 넘쳐나는 선물을 준다면서 친구가 생각하는 과외의 좋은 점을 모두 이야기해 주었다. 또 아이는 가려서 받아야 하고, 이미 싹수가 노란 친구는 먼저 그만두어야 명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노하우까지도 전해주었다. 친구의 설명을 하나하나 들어볼수록 더더욱 과외가 하고 싶어 졌고, 이 친구 옆에서 같이 한다면 든든하고 할 만하겠다는 생각이 점점 커졌다. 집에 돌아오는 길 내내 이미 난 수학 과외 선생님이 되어 있었고, 머릿속에서는 그 삶을 즐기는 이런저런 내 모습을 상상해 보느라 흐뭇하기까지 했다.
그 뒤로 집에 와서 몇 날 며칠을 고민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수학과외의 길로 가볼까...
수학과외를 하고 싶은 이유를 정리해 본다.
1. 지금 내가 받는 월급의 두 배 가까이 벌 수 있다.
-> 가장 강력한 장점이다.
2. 어렸을 때 꿈이었던 수학선생님을 해 볼 수 있다.
-> 난 아이들에게 수학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사람 냄새나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거라 이와는 많이 다르겠지만 어쨌든 일부 꿈을 실현할 수도 있겠다 싶다.
3. 평일 오전 시간을 포함하여 지금보다 훨씬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
->지금 딱히 시간이 부족하다는 생각은 크게 안 들지만 평일 오전시간이 매일 주어진다면 운동도 하고 영어공부도 하고 맛있는 것도 여유 있게 먹으러 다니며 할 수 있는 게 많을 것만 같다.
단점을 정리해 본다.
1. 어느 정도 수입이 생기고 자리 잡기까지 최소 1년 동안은 수입이 턱없이 부족하다. 또 그 이후에도 수입은 매달 변동이 생길 여지가 있다.
->이게 가장 큰 부담이다. 최소 1년 동안 수입을 무시할 수는 없을 만큼 이미 난 맨날 나가는 지출액이 상당하고, 이미 내 월급액수에 생활패턴이 자리 잡은 상태다. 1년만 버티면 월급이상의 수입이 생긴다는 아무런 보장도 없다. 특히, 자영업이 다 그런 거고 그런 걸 감수해야겠지만 내 성격상 정해진 월급이 아닌, 내 능력에 따라 수입이 결정되고, 가끔씩은 내 능력과 상관없이 외부 환경에 의해 내 수입의 변동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니 이 부분이 제일 불안하고 걱정이다.
2. 이 친구와 팀을 이뤄서 하려면 집에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동네에서 시작해야 한다.
->처음 학생을 모집하기 위해서는 이 친구가 하는 동네에서 시작해야 도움을 좀 받을 수 있을 텐데 이 친구 동네까지는 대중교통도 불편하고 오고 가는 시간을 두 시간은 잡아야 한다. 그렇다고 가까운 우리 동네에서 시작하기엔 맨땅에 헤딩하는 거라 자신이 없다.
3. 오후와 저녁 시간이 자유롭지 못해 친구들이나 사람들과의 만남이 어려워진다. 매일 만나는 사람이 학생들이라 성인사람들과의 만남이나 대화가 그리울 것이다..
->술자리를 좋아하고 사람들 만나는 걸 좋아하는 내 성격상,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 없이 저녁시간에 일해야 한다면 이 또한 오래갈 수 없을 것이다.
친구 집에서 흥분됐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생각을 해보니 내 성격상 난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규칙적인 월급을 받는, 그리고 사람들과의 교류가 있는 회사 생활이 나한테 더 맞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쉽긴 했기만 깨끗이 포기했다. 집이 먼 그 친구를 볼 일이 없으니 결국 그때의 흔들렸던 내 마음은 안정이 되었고, 그렇게 한바탕 에피소드로 끝이 났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처음 선택한 이 회사에서 그 흔한 이직 한번 하지 않고 20년 이상을 남아있다.
시간이 흐르고 40대 중반인 지금의 내가 생각해 보면 겨우 30이 넘었던 그 나이 때는 뭔들 못해볼까 싶다. 과외가 아니어도 한 살이라도 젊고 어릴 때, 부양가족 없이 나만 생각할 수 있을 때, 이것 저것 여러 가지 다양한 삶을 경험해 보고 실패도 해보며 살아가는 게 그만큼 다양한 사람들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어지고 내 삶에 스토리도 생기면서 풍부한 인생을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1-2년 수입이 없으면 어떤가. 해보고 싶은 게 있을 때 해봐야지.
그때의 나를 생각하면 앞날이 불안했고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불안한 건 싫었고 그때의 상황이 딱히 불만도 없었기에 내 삶에 찾아온 변화를 선택하지 않았다. 어느 길이 맞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정답이란 건 없으니까. 지금까지 걸어온 길도 충분히 의미 있고 잘해왔다고 생각하니까. 다만 아쉬운 건 너무 안정적인 거, 정해진 것에서 조금은 벗어나보는 경험을 해도, 조금은 정도에서 일탈을 해도 문제 될 건 없고, 오히려 삶의 이야깃거리가 많아지고 인생이 더 짜릿하고 재미있어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