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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medy Dec 21. 2021

12-00 일기 (십이공공번 일기)

홀리 쮓


부제: 홀리 쮓


8, 9,10,11. 1년의 마지막 쿼터 -1month는 뭐랄까, 고난과 역경의 연속, 두려움과 지침의 연장선이라고나 할까..? 생각이 많아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하고 싶은 것만 하던 값을 고스란히 받고 있는 1년의 마지막 1달인듯 하다. 배운 것도 많고, 기록으로 남겨 두고 싶은 것들도 많아 남기려고, 12월의 일기, 한해를 마무리하는 일기를 쓰려한다. 


사실 이 모든 일의 원흉은 나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원망했다. 나는 왜 이런 것들을 겪어서 이렇게 배웠고, 이렇게 밖에는 못사는 사람으로 만들어졌습니까? 내가 이렇게 밖에 못할 때 까지 왜 나를 내버려 두셨습니까? 나 스스로가 답답하고,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눈치챘을 때는 나는 이미 몸, 마음, 영이 꽤나 다친 상태였다. 그래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시고, 그저 묵묵히 있으신 신이 조금 원망스러웠다. 차라리 사랑받지 않는 존재라고 이야기 했으면 상관이라도 없었을 텐데, 기어이 사랑받는 존재라 생각하게 해서, 그 가능성을 제기했기에, 더 큰 아픔을 감내해야만 해서, 그래서 원망스러웠다. 


그 다음에는 사람들이 원망스러웠다. 뒤통수를 치고 가서 내가 사람을 못 믿게 만든 사람들을 원망했고, 어렸을 때 지독하게 맞아서 환청이 들리게 만든 그 사람들을 저주했다. 알지도 못하며 욕하는 사람들, 고맙다고 말하지만 딱히 행동으로 보여주지는 않는 사람들, 본인의 잘못은 하나도 이해하지 않고 나에게만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 오랜 시간 안면이 있었으나 본인이 다가오려 노력해 본적이 없는 것은 생각지도 않고 적응을 못한다고 불쌍하다 말하던 사람들. 나를 비교하며 누구보다 못나다, 누구가 더 나았다고 하는 사람들, 아픔에 공감해 주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저 무시할 뿐인 사람들. 어디를 가나 그런 사람들은 있었고, 그건 내가 교회를 옮기던, 이사를 가던, 다른 직장을 다니던, 소천하기 전까지는 있을, 그리고 있는, 그 사람들이 원망스러웠다. 그런 사람들 투성이인 내 삶이 조금 불쌍했다. 내가 화를 내도 내가 그 화를 내기까지 얼마나 참았으며, 무엇을 감내해야 했는지는, 그래,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생각했다. 나는 사실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게 아닐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가치 한 일 뿐이고, 나 스스로 변화할 수 없다면, 난 무엇을 해야하는가? 


사실 억울했다. 나는 누군가 나를 변화시켜주기를 원했다. 나는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이였고, 목숨 이였으며, 누군가의 즐거움이요, 도움이요, 평화였다. 하나님이 나의 손을 거쳐가게 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조금 더 살아볼만 하다는 생각을, 아직 포기할 때는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감사하다고, 평생 잊지 않겠다고, 기억하겠다고, 믿겠다고, 곁에 있겠다고. 


나는 이제 오히려 그 말이 상처인듯 싶다. 사람의 눈에서 보이는 그 진심은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는 것이기를 알기에 나는 눈에 보이는 진심보다는 그 후에 행해지는 관계, 말투, 시간, 행동들에 조금 더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한 사람들 하나, 둘, 떠나가고, 마치 나는 있는듯 없다는 듯이, 부담스럽고, 힘들고, 어렵고, 불편하고, 짜증나고,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고, 힘들고. 나는 달라진 것이 없는데, 그 사람들이 보는 나는 그리도 쉬이 바뀐다는 것이 더 겁나고, 두렵고, 아프고, 슬펐나보다. 어쩌면 나는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사람들을 원했는지도. 


나는 내가 초능력자인줄 알았다. 정말 뭔 소리를 들어도 괜찮고, 아파도 괜찮고, 그냥 괜찮은, 그런 슈퍼맨 같은 사람인 줄 알았다. 그래서 나는 나를 좀 무너지게 만드는 사람, 경계를 풀어버리는 사람들을 더 멀리하고, 나를 좀 더 바짝 몰아 세우고, 올바른 말을 하는 사람들을 곁에 두기를 원했고, 그러다보니 마음이 만나서 관계를 이루는 것 보다는 머리와 머리가 만나 팀을 이루는 것이 더 익숙해져 버렸다. 머리와 머리만 만나서 해야할 말, 해야할 일, 이런 것들만 하면 얼마나 드라이 하냐는 소리를 들었지만, 나는 그게 더 편하고, 올바른 길이라고 생각했다. 마음과 마음이 만나면 풀어지고 늘어져서 아무런 일이 되지 않는 것을 너무 많이 봤으니까. 하지만 머리와 머리가 만나면, 모든 일이 잘 풀리고 문제가 없곤 하니. 


첫 일기에 나는 내가 교회를 나갈지 말지, 하나님에게 논리적인 이유를 달라고 했다고 썼었다. 하나님은 행복했지만 교제는 행복하지 않았고, 기도는 자유로웠지만 공동체 안에서 자유롭지는 않았다. 하나님은 혼자인 내 곁에서 응원하시고 힘을 주셨지만, 혼자라 힘들다는 내 부탁은 1년이 넘게 지난 후에야 응답을 받았다. 강했다 생각했던 믿음은 나의 이성이 아닌 감정에 꺾이고, 멍들고, 부러졌기에 나는 나의 믿음을 위해서, 내가 생각하는 가치를 위해서 감정을 더 버리려고, 좀 더 논리적으로 생각하려고 했고, 나는 INTJ보다 한단계 더 차가운 INTP가 되었다. 논리적인 이유를 간구했기에 논리와 지식을 탐구했다. 성경을 보고 논문을 읽고 글을 썼다. 그리고 그렇게 머리가 AI화 되어갈 무렵, 성경, 그 지식이 나를 배반하기 시작했다. 


나는 분명, 논리를 달라고 기도했다. 살아있을 논리적인 이유, 교회에 남을 논리적인 이유. 결혼을 기대할, 사람을 믿을, 누군가와 함께할, 팀을 만들, 미래를 꿈꾸고 기대할, 논리적인 이유. 근데 젠장할, 지식은 교만케 하고 사랑이 덕을 세우는거라니. 그는 나에게 빅엿을 선사한 것이다. 누구든지 그 마음에 품은 소망을 설명할 준비를 하라는게, 나는 덤비면 싸울 준비를 언제든지 하라는 줄 알았다. 소망을 전달하라는 것은 못 보고 말이지. 


하나님의, 존나 크고 우람한, 엿. 


애초에 성경은, 하나님은, 기독교는 논리적이지 않다. 신이 사랑해서 인간의 모습으로 개처맞고 조롱 당하다가 끝까지 저 인간들을 용서해달라고 하고 죽은 신이 세상에 어딨는가? 대부분의 신은 겁나게 이쁜 여자들이랑 놀아나거나, 빡쳐서 전쟁을 일으키거나, 영원히 몸상태가 유지되는 쎄끈한 12명의 여자들이랑 평생 지내게 해주던가, 뭐 대충 그런 식인데, 이 양반은 아 글쎄 스스로 본인이 만든 법, 룰을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매달렸단다. 


?!


기독교는 세상에 거스르는 종교라 말한다. 세상은 숫자를 보라고 한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숫자 밖에 없다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눈 깜빡임의 숫자나, 떨림, 작은 경련들, 말하는 속도, 사실 다 숫자란 말이지. 그래도 조금은 몸을 읽는다고 말하는 난데, 또 주식도 하는데 당연히 숫자가 장땡이지. 숫자는 뒷탈이 없다. 하지만 감정은 뒷탈이 참 많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왕들이 여자로 인해 무너졌는가? 


14만 4천명..! 


아 미친, 그래. 나는 기독교의 기본을 잊고 살았다. 내 영적 리더쉽 교수는 우리에게 거의 매주 이렇게 말하곤 했다. 지식에 잡아먹히지 말라고. 우리는, 나는 그걸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는 지식에 잡아먹힌 사람들을 많이 봐왔다고, 지식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한다고 이야기 하곤 했고, 나와 몇몇은 그 말에 지식으로 안되는게 어딨냐고, 세상이 논리적인 사람들로만 이뤄져 있었다면 이 세상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거라 반문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는 기독교는 논리적인 종교가 아니라 하셨고, 우리는 그럼 이건 왜 배우는거냐고 했지. 근데 우리는, 나는, 다 알고 있었다. 신이 왜 굳이 내려왔는지, 왜 내려와서 콩벌레 똥 안에 미생물 같은 인간에게 얻어 맞으시고, 가장 비참한 형벌인 십자가 형으로 생을 마감하셨는지. 


감정은, 배울 수 있는게 아니구나. 


머리로는 알았다. 진짜로.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얼마나 많이 이야기 했던가. 근데 이야기 하는 것, 머리로 아는 것과 실제로 느끼는 건 참으로 다른 일이더라. 머리로 형제를 사랑하라는 건 알았지만 그걸 하는 건 참 다른 이야기구나. 사랑은, 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임을. 변화는 노력이 아닌 되어져 가는 것임을. 


나는 누군가가 누군가를 좋아하게 만드는 것을 참 잘 했다. 심리학에는 은근 친밀감과 호감에 대한 것들이 많아서, 누군가의 호감을 얻고, 신뢰를 얻는 그 일종의 "치트키"는 거의 뭐 보편적이다 싶을 정도로 잘 먹히곤 했었다. 그걸 가르치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연애를 성공시키고 나면 그 묘한 성취감에 내가 마치 뭐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곤 했다. 근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렇게 꼬신 아가씨들이나 그렇게 맺어준 인연들은 다 무언가 탈이 났다. 나를 사랑한 것, 그 사람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 겉 껍데기를 사랑했고 좋아했기에, 나 아닌 나의 모습을 보일 때 실망을 하곤 했었고, 그 콩깍지는 유지 되기 위해 거짓을 낳고, 술수를 낳고, 또 다른 치트키를 낳았다. 


하나님은 나에게 교회를 옮기기 전에 말씀하셨다. 봉인! 이라고. 좋게 보이려 하지 말고, 그저 너 그대로. 그리고 그 여파는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숨길 때에는 고이 숨어있던 나의 모습들, 아직 예수와 닮지 않았거나, 닮았지만 하마르시아, 과녁을 빗나가는 실수를 한 경우들이 줄줄히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사탄과 싸우지 않고, 사람들과 싸우기를 선택했고, 사실 어느정도는 꽤나 즐겼던 것 같다. 신을 믿음에도 나는 자존심과 자존감을 내세우는 사람을 짓밟는 것을 즐겼고, 나는 그것이 마치 신의 일인양, 물론 어느 정도는 있었겠지만, 그 방향이 옳은 방향인양 그의 뜻을 멋대로 해석해버렸다. 


It's my playground, but also God's home-ground. 


그리고, 하나님이 하도 답답하셨나보다. 그는 나에게 떠나가지 않을 논리적인 이유는 단 한가지도 제공하지 않으셨다. 아니, 오히려 더 떠날 이유만 잔뜩 안겨주셨다. 논리적으로 떠날 이유. 교회를 포기하고, 사람을 포기하고, 온전한 기독교인으로 살아가길, 또 예수 닮기를 포기할 이유. 그리고 그는 나에게 3개월간 사랑이라는 단어를 주구장창 보여주셨다. 웹툰에서, 대화에서, 나눔에서, 성경에서, 클라스에서, 논문에서. 특히나 피날레는 지지난주와 저번주. 바울 베드로 야고보는 사랑에 미친 놈들이 틀림없다는 생각을… 하던 중 깨달은 것은, 사랑이 쉬웠다면 강조할 일이 있었을까? 라는 너무나도 단순한 질문. 어쩌면 이 교회의 테크니컬 한 부분들은 나의 존재로 인해 더 성장치 않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들었고. 


사람들은 묻는다. 왜 목사는 매주 매달 매년 똑같은 설교만 하냐고. 그들은 답한다. 니들이 안바뀌니까.. 라고. 그만큼 어렵기에 강조되고, 반복되는 것. 그것이 사랑, 감정이였다. 


물론 나에게 말이지. 


감정은 나를 나약하게 만든다고, 공과 사는 지켜야 한다고 살아왔던 26년은 그렇게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내 중심이 되던 생각들, 가치관이 무너지기 시작하니, 나는 가치관이 없고, 생각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옳은 가치관인가? 에서 옳은 가치관을 가지는 것은 옳은 것인가? 에서 옳은 가치관을 가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은 것인가? 에서 옳은 가치관을 가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고민하는 것은 옳은 것인가? 라는 질문을 하다가 포기하곤, 옳은게 뭔지 나 스스로에게 묻고는 피식, 웃었다. 답은 언제나 그렇든 내 면상에 대놓고 있었다. 그래, 하나님이 원하시는게 선이고, 그 양반이 하라는게 옳은거다. 그는 뭘 하라고 하지? 사랑을 하라고 이야기 한다. 재석아, 너 계산 존나 잘해. 그러니까 이제 못하는거 배우자. 


내가 못하는 건 배우자… 


언제 만나누… 


나는 감정도 손익을 따져가며 이 감정을 내가 느끼는 것이 나에게 이득이 되는가? 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아주 가끔, 그것들로 부터 자유한 시점이 있지만, 그 순간, 그 사람이 없어지면 나는 다시 AI 제렘 베타알파 모드로 돌아가곤 했다. 이득이 없는 분노, 나는 분노를 표하는 것 조차 나의 이득, 혹은 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내곤 했다. 그러니 이득이 없는 사랑, 손해가 날 것 같은 사랑, 두려움이 가득한 사랑, 아플 것 같고 힘들 것 같은 사랑은 나에게 별로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고, 매력적이라 한들 나에게 이성은 감정보다 강함으로 눌러버리곤 했다. 그러나 예수는 이득이 없는 사랑이지만 내 영혼을 얻었으니 족하다 하셨고, 죽음이 손해지만 많은 사람들을 구원했으니 됐다 하셨다. 그도 두려워 포기하려 했으나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극복하셨고, 아프고 힘든 가시밭 가시 면류관을 왕관으로 삼으셨다. 왜? 


You say 사, I say 랑. 


이번 년도에는 내가 아끼는 사람들이 많이 오기도 하고, 또 많이 새로 생기기도 했다. 하나님은 논리적인 가지마! 대신에 감정적인 가지마! 를 시전하신 것이다. 떠나고 싶다는 고민을 진지하게 나누니 슬퍼해 주기도 하고, 당황해 하기도 하고, 화도 내고 짜증도 냈다. 그 누구도 논리적으로 남아야 할 이유를 내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나보다 한참을 더 배우신 우리 목사님도 비젼, 하나님의 마음, 목사님의 마음을 말하셨지 성경을 들이미시거나 신학으로 나를 초토화 시키시지는 않으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한테 굽혀도 됨을, 달라도 됨을, 그리고 생각보다 내가 남들보다 잘하는 것들이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음을 보여주셨다. 그래, 애초에 내가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의 베이스는, 나는 병신인데 왜 나보다 못하지? 사람 새낀가? 였으니까. 내가 남들보다 잘 할 수 있는 것이 있음, 즉 나에게도 받은 달란트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성경을 부정하는 것임을 깨달은 후에 그것이 얼마나 큰 유레카 였는지. 


여전히 이해는 안된다만. 


하나님은 그렇게 사람과 성경을 통해서 나를 바꿔 나가기를 원하시나보다. 내 목소리가 좋다고 하는 귀가 이상한 사람들이 늘고 있는 걸 본다던지, 아니면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라 이야기 해주는 사람들이 늘어 간다던지, 멋진 새끼라 해주는 사람들이 생긴다던지. 그는 겁나게 별종이라 별종인 나를 그리도 잘 다루시나보다. 


나는 여전히 자유함이 없는 자다. 상처와 죄에 대한 자유가 없는, 아직 갈 길이 먼, 어딘가 부족하고, 망가지고, 부서져버린, 그러나 서 있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래, 마치 작은 군인 병정같이. 낡고 바래버린 베레모 조차도 제페토 할아버지가 만지시면 피노키오가 되겠지. 그렇게 피노키오는 사람이 되고. 


나는 언제쯤 사람이 될까? 라고 코가 120미터로 자란 제레미노키오가 말했습니다. 


그러니 나는, 여전히 모르겠고, 복잡하고, 힘들고, 지치고, 두렵지만, 그래도 망가져만 있고 싶지는 않아서. 주저앉아만 있는 건 일단 내 스타일이 아니다, 이 말이야! 그러니 나는 오늘도 제페토 할아버지를 만나러, 그에게 묻고, 대화하고, 답답함을 토로해 보려고 말이지. 그러면 언젠가 자란 코가 줄고, 깎이고, 베이고, 잘리고, 결국에는 팔 한쪽, 머리카락 한 개씩, 나도 모르는 새에 사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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