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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medy Mar 20. 2022

작은 것, 소중함

부제: 외토리는 도토리야


부제: 외토리는 도토리야 


뭔가 굉장히 혼자 밥을 먹고 싶지 않거나, 무언가 답답함이 쌓이고 쌓여 누군가가 톡 건드리면 펑 하고 터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때가 종종 있다. 하지만 딱히 그런 것들을 이해해주거나, 받아줄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그 답답함을 쌓고 누르다보면, 약 1년 반 주기로 펑! 하고 터져버리는, 그런 때가 있다. 그런 펑 하는 기분이 들 때 주로 보이는 조짐은 극심한 빡침과, 엄청난 답답함과, 숨겨지지 않는 날섬과 공격성, 비관성, 이해받지 못한다는 씁쓸함, 그리고 결국 내가 한 모든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지 않았나, 하는 허무함 등이 있다. 털어내고 이해해주는, 혹은 이해하려 노력하겠다 한 사람들의 말은 자의로든지 타의로든지 결국 지켜지지 않기에, 희망없이 혼자서 버텨내야한다는 씁쓸함과, 역시 인생은 혼자 살다 혼자 죽는 것이라는 깊은 깨달음,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 하려는 하나님의 마음, 에 쓴 조소를 피식, 하고 지어보이고. 


문제는 내가 저번에 펑 하고 터졌을 때, 제대로 터지지 못했다는 것에 있다. 차라리 후련하게 터졌으면 좋겠으려만, 하필이면 내가 신앙인이요, 신학생이요, 리더요, 뭐 그런 것들이라, 감정을 빼고 이야기 했다보니 체한 것이 다 사라지지 않아서 그리 오랜 시간이 되지 않았음에도 이 기분이 슬그머니 다시 오는 것 같기도 한다. 누군가에게 푸념을 늘어놓을 수도, 편안하게 뒷담을 까고 욕이나 할 사람도, 나랑 똑같은 생각을 해서 똑같이 행동하는 사람도 없기에, 또 어차피 이상한 반응들만 있을 것이기에, 나는 혼자를 선택한다. 뭐,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가끔 이야기 하자고, 밥이나 같이 먹자고 할 때도 있고, 그런 편안함과 쉼으로 그래, 저 사람들도 열심히 살고 있는 거겠지, 열정이 없는게 아니라 능력이 없는거겠지, 생각하며 참아내곤 하는데, 음 그래, 나에게 쉼과 기댐이란 허락되어지지 않는 것 이란걸 다시금 대충 깨닫고 함께하느니 혼자하지… 어느덧 다시 그 마인드로 돌아가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닌 그냥 내 편한대로 사는 나는야 자유로운 제레미, 그렇게 행동하게 된다. 나는 보이지만 저들은 보이지 않는 이유를 도저히 이해 못하겠고, 저들이 보인다 하지만 내게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답답해서, 또 이걸 하나하나 조용히 알려줄 사람도 주변에는 없기에 말이지. 


돈이 웬수야 돈이. 


그래서 나를 들어줄, 위로해 줄, 놀아줄 사람도 없고, 결국 신만으로는 도저히 해결되지 않는 감정들이 쌓이고, 하나님은 도저히 풀어내시지 못하신 그 문제들 때문에 답답하고, 뭐 그런저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 누군가에게 토로하고 싶었던 그런 날, 누구도 함께 하지 않아 씁쓸하게 과거에 내 마음에 평안을 주던 곳, 그래, 그곳으로 향했다. 하나님으로 풀지 못하는 감정, 결국에는 술로 눌러야 하는 감정, 같이 마셔줄 사람도, 마실 수 있는 사람도 없다는 것에 허무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지.. 라는 마음으로 나갈 채비를 하려는데, 머피는 머피인지라 안 좋은 일은 같이 일어난다고 했던가. 그래. 그냥 그 날은 나와 머피가 우리는 둘도 없는 베프임을, 나와는 뗄 수 없는 존재임을 상기시켜준, 그런 날이였다. 


그래서, 그래, 그곳으로 갔다. 비스킷과, 술 세 캔과, 굴 통조림 세 캔을 들고서. 3년전 내가 그랬듯, 빈 곳을 찾아 앉아서 노트북을 켜고, 미뤄둔 게임들이나 영화를 보면서, 에효, 그래, 이거면 되겠지, 라는 생각으로. 3년전 나를 꾸준히 위로해준, 우울에서 나를 구해준 나의 루틴이니, 이번에도 나를 위로해 줄거야, 라는 희망 한줌을 가지고서 말이지. 


어렸을 때 부터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지금을 소중히 해라,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너 나이때에는 해야할 것들이 있어서 그 나이 지나면 다시는 그 감정과 그 경험을 못한다. 뭐 그런 흔한 어른들의 잔소리. 아아, 그때와 나는 같은 사람이지만, 결국 상황이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버렸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버스를 타고 걸어 걸어 1시간이 걸려 겨우 간 곳에, 이제는 차를 몰고 15분만 가면 갈 수 있는 곳. 3년을 가지 않아 같지만 다른 곳. 그때는 한없이 컷지만 나도 커버렸는지 뭔가 조금 작게 느껴지는 그곳이, 더 이상 편하지 않고 묘하게 불편한 기분에 여기서도 나는 위로받지 못하는건가, 하는 불안이 슬그머니 비치고. 


신학생이여도, 신앙인이여도, 리더여도 나는 하나님으로 모든 것이 채워진다는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그건 거짓말이니까. 하나님으로 모든 것이 채워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으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신을 믿음, 혹은 위로를 받음은 "언제나", 혹은 "항상"을 동반하지 않는다. 왜냐면 모든 사람이 그정도 수준에 도달해 있지는 않거든. 만약에 항상, 언제나 라는 수식어를 믿음, 지혜, 삶, 위로 같은 것에 늘상 붙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예수밖에는 없을테니. 그래서 나는 꼭 이야기 한다. 그래, 인생에는, 하나님으로는 위로받지 못하는 것들도 있어, 그래, 그럴 수 있어. 신앙인 이라면 하나님으로 해결해야지! 는 강요다. 불가능한 강요다. 마치 성욕은 부부간의 성관계로만 해결해야지! 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다들 안다. 결혼 안한 사람들이 어떻게 스스로 성욕을 해결하는지, 혹은 결혼을 한 사람들이, 부부간의 관계로만 해결하는지. 그래, 맞다. 하나님과 친밀하지 못해서 그런 것, 맞다. 친밀해져 가고 있지만, 지금은 아니니까. 물론 고삐풀린 망아지가 되어 클럽을 가고, 남자 여자를 끊이지 않고 사귀고, 미친듯이 술을 퍼마시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음날 섬김과 예배에 지장이 될 정도로 술냄세를 풍기며 와도 된다는 소리도 아니다. 나의 외로움으로 타인을 해치는 일은 하지 말아야지. 하지만 제어와 절제를 동반한, 분노를 삭히는 스트레스 해소, 그 역시 필요하지. 


결국 그날, 나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나의 아픔을, 힘듦을, 답답함을 녹여내고 말았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 했다. 하나님, 당신이 만일 내가 당신으로 이 모든걸 푸시길 원한다면, 내가 그렇게 되게 해주세요. 근데, 그렇게 안되게 하시고 그러라는건 내가 이해가 안가네요. 못하는 걸 어떻게 해요, 사람이 하루 아침에 바뀌는 것도 아닌데. 애초에 내가 마시는걸 원하지 않으셨으면, 그런 일들이 없게 하시거나, 누군가를 보내주시거나, 위로를 하시거나, 뭐라도 하시고 그러셨어야죠. 이런 생각들과 푸념들을 하는데, 하나님이 그러시더라. 난 뭐라고 한적 없는데? 


그래, 그러시더라. 내가 참고 참고 참아서 아무도 없는 곳에서 감정에 잠겨 녹여내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래, 재석아, 살아만 있어다오, 피투성이가 되어도, 죄를 지어도 좋으니 살아만 있어다오. 살아있어야 내가 무언가를 하지 않겠니.. 라고 하신다. 


그래, 그게 사랑의 정점이라 불리는 자의 행동이지. 


고작 술 좀 마셨다고 눈치를 봐야한다니. 그게 무슨 아버지야, 종이지. 그게 무슨 구원자야, 구속자지. 그게 무슨 친구야, 꼰대지. 


Latte is a horse… 


그래서 나는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는 사람에게만 뭐라고 한다. 그 사람의 행동을 보고 그러지는 않는다. 그냥 하나님이, 너 리던데 말이야, 너 이거보다 잘 할 수 있는데 말이야, 너 도피 하지 않을 수 있고 더 잘 할 수 있는데 말이야, 왜 안하니? 라고 하는 사람들만. 그래, 적어도 나 만큼은 참아야지. 나 만큼은 변하려고 노력했어야지. 참고 노력하지 않고 노는걸 스트레스 푸는 걸로 합리화를 하니, 내가 화를 내지. 그런게 아니면, 난 생각보다 온유하고, 이해하는 사람이다. 상담사잖아.. 내가 늘 화를 내는건, 내가 느끼기엔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답답한 것 같을 때, 그런 때가 대부분이거든.. 더 잘할 수 있는데.. 더 할 수 있는데.. 그러면 안되는데… 그런 답답함. 애초에 못할거라고 생각하는 인간들은 내가 신경도 안쓴다. 못하는데 뭐 어쩔거야. 할 수 있는데도 안하는게 문제지. 하나님이 기대를 가지고 있지만, 그 이하를 하는 것에 만족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답답해하며 이것보다는 잘 할 수 있다고. 그래, 왜 이것 밖에 못하냐는 이야기가 아니다. 더 잘 할 수 있음을 이해하라는 말이지. 방법을 바꾸던, 루틴을 바꾸던, 소비 습관, 인간관계, 무언가를 바꾸어서, 최선의 방향이 올바르게 되도록 하지 않느냐고. 


그렇게 마시고, 보고, 누르며 시간을 보내다 문득 내가 지내던 다른 곳들이 궁금해서 돌아봤지만, 슬프게도 3년전의 그 갬성은 사라지고 말아서 아, 나는 너무 늙었구나, 내 이곳 생활은 이제 사라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래도 이곳이 그나마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못하는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라는 것이 씁쓸했다. 그리도 많던 술친구들은 어디로 갔으며, 나를 이해해주던 사람들은 어디로 가서 사라지고 없는지.. 어쩌다보니 무인도 한 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여져 있는, 그래도 윌슨이 있는게 어디야. 나의 윌슨은 안에 사람은 없지만 사람의 목소리를 내는 이것. 그래, 결국 윌슨이지. 무인도에 오래 있던 나는 차라리 진짜 사람보다는 윌슨이 편하거든. 


약속 되어진 것에 영원함은 없다는 것을, 나는 수 없는 깨어진 약속들로 이미 알고 있다. 몇 십, 몇 백의 사람들이 나에게 말해준 평생 감사하겠다, 평생 같이 있겠다, 평생 미안해 하겠다, 평생 돕겠다 라는 말들의 배반을 겪고도 나는 여전히 어리석고 또 희망을 품는 자라, 너도 다른 사람이랑 똑같을 것이라 말해버리면, 그래, 그들의 답 역시 같다. "나는 달라" "두고봐" "그럼 알겠지". 


음 그래, 잘 알겠더군. 


반전은 없드라구. 


그래, 나는 시니컬하다. 약속을 믿지 않는다. 내가 30개를 잘해줘도 하나만 못해줘도 토라지고 등을 돌리는게 사람이다. 나도 완벽하지 못해서 모든 부분을 다 케어하지는 못하건만, 도움 받는 것에 익숙한 것인가, 처받기만 하는 것이 익숙한 것인가, 음 그래 이 또한 상한 심령이라. 나도 노력하지만 결국 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다수가 소수를 억누르는게 쉽지 소수는 다수에게 맞서 싸우기 쉽지 않다고. 나는 결국 혼자요, 그들은 다수인데, 교회는 많은 자가 적은 자에게,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그렇게 흘러 내려와야 하거늘, 결국 다수는 썩어지게 되고, 나는 또 다수를 만들어보려고 하고. 


주께서 받으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맞다. 그렇다. 하나님, 나 혼자서 좀 풀게요, 이것도 예배다. 그래, 술마시고 아픔을 승화시키는 것도, 예배다. 하나님이 풀어주지 않으셔서 나 스스로라도 풀려고 발버둥치는, 그래서 여전히 누군가를 돕고, 배려해주며 받은 상처들, 나는 배려 받지 못하고 이해 받지 못하는 상황들 가운데에서 받은 상처들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그만두는 것은 하지 않으려고, 그렇게 미친놈 처럼 발버둥 치는 내 모습은 기독교인인데 술이나 처마시는 놈, 그 이하로 치부되어 버린다. 나에게는 술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게임이요, 섹스요, 자해요, 나태함이요, 자위요, 외면이요, 분노요, 짜증일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이제 깨닫게 되었다. 나는, 우리는, 살기 위해서, 죄를 짓기도 한다는 것을. 우리는, 나는,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때론 죄의 모습을 한 스트레스 해소를 해야만 한다는 것을. 우리를 그래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그래, 그래. 살아만 있어다오. 내가 다 옳게 만들어주마. 그저 그곳에 남아만 다오, 라고 하시는 것을.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피투성이가 되어도 살라고 하셨다. 그 피투성이가 된 이스라엘은 죄를 짓지 않았을까? 하나님의 사랑 이라는 것은, 죄를 짓는다해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함에도, 우리는 너무나 많은 주입식 교육을 받아버렸다. 죄 짓지 말라고. 근데 나는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죄 천천히 끊으라고. 그것이 너를 살게하는 것이라면 말이지. 술 중독인 사람들에게, 그 술이 없으면 하루하루를 못버틸 것 같아서 술독에 빠져 사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그곳에서 빠져 나오게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라면, 서로를 위해 그 술에서, 게임에서, 섹스에서, 자해, 나태, 자위 외면, 분노, 짜증에서 나오게 해주는 것도 분명 사명일지라. 그렇다면 분명, 내가 빠져나오지 못하는 죄들에서 나를 빠져나오게 할 사람도 세상 어딘가에 반드시 존재하리라. 


배우잔가요..? 


도토리는 여럿이서 옹기종기 모여있다가 땅에 떨어져 버리면, 자신을 보호해주던 형제자매들과 가시를 벗어나 혼자의 삶을 살게 된다. 나의 삶은 도토리 같다고 생각했다. 지금 교회나, 이전 교회나, 나를 보호하려고 해준 사람은 많지 않다. 아니, 서로를, 아는 사람들만 보호하기에 바빴다. 목사나 리더도 마찬가지. 사람인지라 자신이 더 마음이 가는 성도에게 잘해주는 모습을 나는 이해하지만, 결국 나는 도토리야, 이곳에서 나는 홀로 벗겨져 덩그러이 놓여져 있는 도토리야, 라고 되뇌이는 자들을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변화는 이런 사람들이 만들어내지. 


도토리는 외톨이야, 는 너무 클리셰 적이라, 외토리는 도토리야, 라고 귀엽게 적어보았다. 이 교회의 깜찍이 귀염둥이 섹시 큐티 Boy♂ 의 역할을 맡은 나라면, 그래 이정도는 껌이지. 훗. 


한껏 힘주어 살았었지만, 이제는 그냥 맡은 것, 그래, 봉사, 그리고 내 신앙, 두가지만 노력할란다. 이거 두개에 딱히 도움이 안되는건,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게 아닌 이상, 음, 보류. 나는 혼자가 아니지만, 결국에는 혼자라서. 그래 맞다. 이제는 좀 쉬어 갈때도 됐지. 그래 뭐, 난 하나님이 맡기신 일만 할거다. 나머진 뭐, 누가 뭐라한들, 나를 고쳐 줄 것도 아니면서 말이지. 나의 사람들에겐 더욱 따스하게, 아닌 자들에겐 더욱 냉담하게. 나의 따스함을 원하면, 이제는 내가 먼저 다가가지 않아야지. 그렇게, 또 이렇게, 조금씩 소모를 줄여나가다 보면, 어느새 다시 일어나 좀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겠지. 어차피 뭐 수명은 저 위에 존재에게 달린 것, 욕이나 홀랑 한바가지 얻어먹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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