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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medy Jan 04. 2022

12 02 일기 (십이 공이번 일기)

부제: 쀼


2022 1월 1일, 00시00분이 되었다. 하나 둘 씩 말씀을 뽑고, 한해는 어떤 말씀이 나올까, 포츈 쿠키를 뽑듯 하나 둘씩 말씀을 뽑아본다. 그리고 나온 말씀, 잠언, 지혜가 너로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여 또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하리니. 그래, 아는 사람들은 아는, 나의 배우자 기도 말씀이다. 


한때 하나님은 그저 죽고만 싶었던 나에게 결혼이라는 목표를 희망삼아 살게끔, 결혼하면 죽을 수 있을 것 처럼 이야기 하시곤 하셨다. 그래서 나의 목표는 결혼한 다음날 죽는 것. 그래도 첫날밤은 지내고 싶었나보다. 그래서 한동안 결혼식 다음날 죽을 것 같은 사람으로 지목 되기도 하고, 나를 결혼 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라면 이뤄드리지요, 라는 마인드로 신부를 위해서 기도하기도 했었다. 물론 이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결혼이 아닌 나의 행복이요, 첫날밤이 아닌 번성, 죽음이 아닌 생명이라는걸 어렴풋이나마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는 나에게 하나님은 지혜로운 여성을 주겠다고, 네가 나 때문에 살았으니 내가 지혜로운 여성을 주어 너로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고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하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지혜양 어디계시죠…. 


세상에 있는 지혜양들 연락 한번만… 


안다. 이름이 지혜가 아님을 안다. 지혜가 무엇인지 이제는 깨달아간다. 하지만 그런 지혜로운 여성에게, 혹은 그렇게 될 사람에게 나는 아직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에게 지혜로운 여성을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나를 그 여성에게 알맞은 사람으로 만들어가고, 그 여성분이 기도할 하나님을 자신보다 사랑하는 사람에 알맞은 사람이 되게 그 사람을 지혜롭게 만드신다. 남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함으로 기준을 세운다. 여성은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고 따르고 신뢰하는 남자를 보며 신뢰하고, 믿고, 지혜롭고 현명하게 그 사람을 도와준다. 그렇게 남자는 머리요, 여자는 돕는 베필이 되고, 다스리지 않는 머리요, 성질내지 않는 혀가 사랑으로 이끌어내는 머리요 화합하는 혀로 변화한다. 


성경에 직접적으로 거론되지는 않지만, 여성들이 수군대는 것은 비단 현재 교회에서만 있던 문제는 아니였다. 초대교회에는 압도적으로 여성의 숫자가 남성보다 많았다. 그래서 있었던 수많은 소리들을 바울은 한마디로 제압한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 (1Cor 14:34-35). 물론 하나님의 평등의 법을 그 누구보다 강조한 바울이기에, 여자가 감히 남자들이 말하는데!!!! 이러는 말은 아니다. 각 편지는 각 저자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때 당시의 문제점들을 이해하고 해석해야한다. 


고린도전서 14장은 사랑을 추구하며.. 라는 말로 시작한다. 26절부터는 질서있는 예배 라는 소제목을 가지며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라는 말로 시작을 한다. 그렇다면 간단한다. 14장에서 하지 말라는 것들은 사랑에서 난 것이 아니요, 26절 이후의 하지 말라는 것들은 덕을 세우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진짜 답은 36절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그래, 여성들은 마치 자기들만 옳은 듯 당파를 나누었고, 마치 하나님의 말씀을 본인들만 받은 듯 타인을 순종하게 만드려고 했었다. 그래서 바울은 강압조치를 취한다. "복종"할 것을. 순종은 자발적인데, 자발적으로 하지 않으니 복종하라는 의미다. 나는 순종이 안되면 하나님, 혹은 하나님을 더 잘 아는 사람에게는 복종하려 노력하는 사람, 아 근데 시러요 아 저 사람 잘못이요 찡얼대기만 하지 않는, 스스로가 틀린 줄 아는, 자신의 조그마한 인간관계만 챙기면 되는 줄 알고 찡얼대거나 하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딸래미.  


나는 찡얼대는 말투가 싫다. 높은 목소리도, 짜증내는 소리도, 감정적인 말투도, 무작정 따지려는 말투도, 자신만 상처 받았다는 투의 이야기들도. 질릴대로 질려 버렸어, 라는 생각에 문득 나를 돌아보니, 그래, 뭐, 결국 나는 나의 상처로 남을 상처주는 사람일 뿐이였고. 


3-4년 전에 육성재-조이 편의 우결을 참 재밌게 보았다. 뭐랄까, 그냥 솔직한 마음들, 다양한 얼굴들, 안타까운 마음들이 모여 조이의 예쁜 얼굴과 함께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달까..? 질긴 인연을 끝내고 다시 사람을 만날 준비가 안되어 있었을 때, 소소하게 재밌게 즐길 수 있었고. 거기서 나온 "쀼" 그러니까 부부, 는 뭐랄까, 참 색다르고 두근대는 단어였던 것 같다. 그래, 맞다. 이번 일기는 연인 관계에 대한 일기다. 


나는 참 연애를 못한다. 아니, 그냥 인간 관계를 잘 맺지 못한다. 사람을 분석해서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고 의지하게 만들 수 있지만, 정작 나는 그렇게 하지를 못하기에 유의미한 관계로 이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문편이다. 꼭 여친 남친 이런게 아니라도 말이다. 같이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하늘에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나니, 나는 한동안 마치 "혼자 살아남은 사람" 같이 느껴졌었다.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였다. 싸움도 같이하고, 놀고, 먹고, 마시고, 울고, 화내는 것들 모두, 나의 가장 어렵고, 지치고, 초라하고, 외롭고, 찬란하고, 즐겁고, 고통스러웠던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들이 하룻 밤 사이에 증발해 버리는 것이, 삶에서 마치 누가 핀셋으로 뽑아가듯 사라지는 것들을 여러 번 경험하니, 그냥 이게 내 운명이구나, 생각하기도 하고. 그래서 나는 잘 붙잡지 않는다. 사라질 사람은 어떻게든지 사라진다는 것을 알기에. 그래서 모든 사람들을 결국에는 떠나갈 사람으로 본다. 그러기에 내가 곁을 내어준다는 건, 셋 중 하나다. 떠남을 감당할 만큼 무언가 결단이 있거나, 떠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거나, 아님 걍 하나님이 시켰거나. 


심리학에서는 전해져 내려오는 악이 쉬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이야기 한다. 가장 쉽고 보편적인 예는 폭력성이다. 부모가 아이를 때린 경우, 높은 확률로 그 자녀는 자신의 아이들을 때리게 된다. 성적으로 문란한 부모를 보면 아이도 문란하게 되고, 약물 복용하는 부모가 있으면 자녀들도 따라한다. 죄는, 전염성이 있다. 그리고 이 전염성은 내가 내 아들, 딸에게 고스란히 물려주게 된다. 나는 이게 너무 싫었다. 신앙심을 물려주기엔 가진 신앙심이 쥐꼬리만해 줄만한 것이 없는데, 선이 아닌 악은 물려줄 것이 차고 넘친다. 


나는 어렸을 때 맞았던 기억, 특히나 사람들 앞에서 억울하게 혼난 기억들이 참 많다. 윽박지르는 모습도, 어렸을 때 혼자 있던 그 모든 순간에 괜찮다고 했어야 했던 기억들도. 그래서 나는 혼자 있는 사람 곁에 있어주고, 억울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아이들에게 윽박지르지 않고, 폭력적이지 않으려 무던히 노력한다. 그리고 그런 행동을 보이는 사람을 거의 혐오하다시피 한다. 어쩔수 없어, 라는 이야기, 최선을 다했어, 라는 이야기는 오은영 쌤이 들으시면 입에 거품을 무시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근데 사실, 나에게는 그때 받은 상처들이 아물지 않은 모습들이 너무나도 많다. 아가들에게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 대신, 나는 나보다 윗사람이나 내 또래들을 그렇게 대한다. 혼내고, 윽박지르고, 홀로 내벼려 두고, 폭력적인 언어를 사용한다. 어른이라 법이 무서워 안때리는건지, 진짜 안때리는 사람인건지는 법이 사라져봐야 알지… 나는 내가 아픔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앎에도, 나 스스로를 상담하려고 하면 어찌 해야할지를 몰라서 쩔쩔맨다. 가끔 내 상황과 이야기들을 내가 제3자로 듣고 조언을 주면 뭐라고 할까, 뭐 이런거도 해보는데, 음… 답이 없더라. 그래서 나는 그냥 포기해버렸다. 근데, 그냥 또 포기해 버리기에는 희망과 자존심이 날 붙잡고 내버려두지를 않아서, 난, 그래, 좀 더 하나님한테 매달려 본다. 


Nodab. 


성경에 노답이 나오듯 (역대상 5장 19. 르우벤 자손의 팀은 하갈 사람들과 노답과 싸울 때 힘을 입었다. 역시 인간은 노답과 싸워야 힘이 나는 존재…) 나는 나의 이야기안에서 노답이다. 아직 나 스스로도 답을 온전히 찾지 못했기에, 타인의 이야기 안에서 살아가지 않게 나와 누군지는 모를 아내를 보호하신, 참 생각 많고, 배려 깊고, 사랑 많으신 저기 저 위에 어딘가에 둥둥 떠있는 하나님. 혹은, 지금 이 농담에 웃으시는 예수님. 


공이번 일기는 조금 더 길게 쓰고 싶었다. 내가 깨달은 것들, 하나님이 2021년에 보여주신 것들, 그리고 2022에 기대하게 하시는 것들. 또 말씀하신 것, 명령 하신 것, 나의 경험, 뭐 그런 것들. 근데, 간증은 글이 아닌 말로 전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삶을 알아야 내 간증이 왜 간증인지, 이게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테니까. 그러니 혹시라도 궁금하다면, 물어봐주면 된다. 독자라고 떳떳하게 알려주면 나도 아 이 글을 읽는 내 지인이 존재하는구나… 하고 기부니가 매우 조아지지 않을까 싶다. 아직 세개나 더 남은 2021 결산 일기/2022 일기. 기도하다가 올려야 할 때라고 생각 할 때 마다 올리는 이 일기. 누가 읽을지, 어떤 마음일지, 이 긴 글을 다 읽어주는 사람은 있는지. 


있다면 짧게 인사라도 남겨줘요, 궁금하네.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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