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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병준 Jul 26. 2021

초인적인 책무에 대하여_죄와 벌

표토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읽고 나서

  이야기가 절반을 지날 때쯤 무렵 작가는 등장인물들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이러한 방식은 내겐 낯선 모습이었는데, 왜 지금에야 이 이야기를 꺼내는지, 이 이야기가 과연 로쟈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궁금증이 들었다. 놀랍게도 모든 이야기는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군데군데 비어있는 그날의 이야기를 메우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완성되었을 때 로쟈가 벌인 모든 사건은 사실 운명이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시간으로 보면 정교하고, 인물로 보면 입체적인 이야기가 완성되었다. 정말 도스토예프스키는 굉장한 작가다.

  이야기가 메워져 갈수록 나는 등장인물들에 대한 분노가 일었다. 앞서 글을 쓸 때에는 지긋지긋한 가난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 생각했지만 지금 보니 그들 스스로 지긋지긋한 사람들이었다. 채무에서 벗어난 두냐와 어머니의 태도, 부끄러움에 치를 떠는 루쥔, 끝내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는 카체리나를 보며 가난은 하나의 변명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이 역겨운 것은 그 안에 뒹굴고 있는 우리들의 악취 때문이구나. 그리고 그 악취의 중심엔 로쟈가 썩어가고 있었다.


작품 속 소냐의 모습은 연민 그 자체였다. (https://stpetersbasilica.info/Altars/Pieta/Pieta.htm)

  그렇기에 작품 속에서 두 사람이 유독 빛나 보였다. 포르피리와 소냐. 추악한 도시에서 곧게 허리를 펴고 서 있는 인간의 모습이었다. 가난에 얼굴을 붉히고,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당황할지언정 그들은 가장 인간다운 모습을 보인다. 친한 지인이 자신은 죄와 벌에서 포르피리를 가장 좋아한다는 말에 물음표를 띄웠는데 이제는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참고로 상 권에서는 이보다 얄밉고 재수 없는 등장인물이 또 없다.

  어느 지점부터 그들은 인간을 초월한 존재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두 사람의 존재는 19세기 러시아 문학에서 느낄 수 있는 짙은 기독교적 복음이기도 하다. 죄를 짓고 방황하는 로쟈에게 길을 밝히고, 다시 밝은 곳으로 나올 수 있도록 손을 내미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성경 속 한 장면 같았다. 그리고 포르피리의 입에서 나온 단 하나의 문장은 나와 이야기를 사정없이 흔들었다.


태양이 되십시오.


  아! 이 한마디에 나는 카뮈를 떠올리고 말았다. 줄곧 우리의 머리 위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는 하나의 빛이 되라니! 죄인에게 다른 이를 비추는 존재가 되라니! 마치 신이 포르피리의 몸을 빌려 로쟈의 앞에 나타난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복잡한 심리학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 안의 메시지는 지극히 단순한 진리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짓는다. 이는 인간이라면 필히 겪는 숙명이다. 우리는 그 불행의 굴레를 벗기 위해 죽음에 가까운 노력을 기울인다. 물론 그것은 초인적인 책무다. 그러나 인간들이 오래 걸려서야 비로소 성취할 수 있는 일을 우리는 흔히 초인적이라고 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초인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줄 하나의 글을 남기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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