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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병준 Jul 11. 2021

이 지긋지긋한 가난이여_죄와 벌

표토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읽고 나서

  책을 읽다 보면 다른 책들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경험을 한다. 작품 안에서 등장하는 다른 작가들의 책이나, 작품 바깥에서 작품에 영감을 준 책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독자로서 덩달아 읽고 싶어지는 마음. 최근에는 알베르 카뮈에서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을지, 무라카미 하루키에서 토마스 만을 읽을지 고민하다 전자를 택했다. 당분간 러시아 문학에 빠져 살 것 같다.

  표토르 도스토예프스키,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 러시아는 눈보라 치는 차가운 땅 위에서 뜨거운 감정의 꽃을 피웠다. 러시아에서 불어온 십구 세기의 짙은 향기는 많은 창작자에게 영감을 주었다. 카뮈와 헤밍웨이는 물론이고 철학, 문학, 심리학의 대가들이 그를 극찬했다. 오죽하면 아인슈타인마저 그를 향한 애정을 비추었을까? 도스토예프스키에겐 어떤 매력이 있기에 이토록 인기가 많은지. 그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내 마음속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어떤 과학자보다도 많은 것을 나에게 준 작가, 도스토예프스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작가들이 사랑하는 작가에겐 특별한 이유가 있구나, 오백 쪽 가까이 되는 책을 정말 무서운 속도로 읽어 내려갔다. 정말 어마어마하게 글을 잘 쓴다. 굵직한 주제와 사건들은 강렬한 인상을 남기면서도 등장인물들은 작은 대화를 끊임없이 주고받는다. 이야기를 넓게 보아도, 대화를 좁게 보아도 정말 치밀히 잘 쓰인 책이다. 인물들의 개성도 뚜렷해서 이름이 복잡해도 누가 누구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나는 그중에서도 라주미힌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이 능글맞은 청년 같으니. 읽을수록 매력이 넘치는 사내였다.


알렉산드르 코스니체프 <수도사>

  작품에 깔려 있는 주제는 백오십 년이 지나도 유효한 질문들이다. 가난과 죄를 마주한 인간, 그로 인해 마음에서 일어나는 자기 합리화와 죄책감 사이의 끊임없는 갈등. 따분한 현실에 안주하는 관료들과 흔들리는 정세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지식인들을 나란히 묘사하며 작가는 현실의 그 모순된 지점을 비집고 들어간다. 어찌나 얄밉게 묘사를 하는지 로자의 행동을 용납할 수 없으면서도 잡히면 어떡하나 걱정하게 된다. 로쟈는 어쩜 마음이 그리도 갈대 같은지 도와주면 싫고 없으면 허전해하고. 나는 작품과 연애를 하고 있는 감정이 들었다.

  나는 가난한 학자의 입장에서 책을 읽었다. 세상의 진리를 탐구하는 일은 멋지고 숭고하지만 사람의 가죽을 쓰고 태어난 이상 먹는 것도 신경 써야 하고 돈에 구속될 수밖에 없다. 휴일을 반납하고 실험실로 향하는 학생들을 알아주는 이 누가 있을까? 지금도 끊임없이 '실용' 또는 '현실'이라는 이름의 유혹이 들어온다. 그만 공부하고 회사로 들어오는 건 어떠니. 굶으며 공부하는 것보단 좋은 차 끌면서 결혼도 해야지. 나는 학문을 배우기 위해 학교에 들어왔건만 이제는 산업의 역군이 되라니. 이보다 억울한 일이 있을까? 우리는 로쟈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결국 이 모든 문제는 지긋지긋한 가난 때문이다. 지금의 사회는 인간의 이성과 꿈을 담기에 너무나 가난하다. 정신적으로나 구조적으로나. 모두가 원하는 길을 걷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할지 감도 오질 않는다. 지식의 탑을 쌓아 오던 세계의 유명 대학들이 재정난으로 곤경을 겪고 있단 뉴스는 작품 속의 공상이 현실로 다가왔음을 알리는 듯하다. 첫 번째 인터내셔널의 물결이 러시아를 뒤덮을 때에 쓰인 이 작품은 지금의 상황을 예견했는지도 모르겠다.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있음에도 불행한 사람들의 초상을 말이다.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 수 없어. 나는 이 문장이 멍청해지는 순간이 왔으면 좋겠다. 우리는 세상에 내려온 이유를 탐구할 권리가 있다. 학문과 예술로서, 혹은 삶의 방식에 있어 자유롭게 세상을 유영해야 한다. 하고 생각한다. 아. 이 책이 대학생 필독서인 이유가 여기에 있구나. 책을 통해 어수룩한 학생은 한 명의 현인이 된다.


이제 이야기를 반 읽었을 뿐이다. 다음 장에서는 로쟈의 사건 이후 그가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는 장면과 비슷한 상황에서 다시 일어나는 이들의 이야기를 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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