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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병준 Jun 20. 2021

하루, 한 권의 책_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알렉산드로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를 읽고 나서

  책은 흔히 간접경험이라고 한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어떠한 예술적 영감을 받기도 하고, 공감을 통해 뜨거운 감정을 끌어올리기도 한다. 화려한 장면이 없어도 우리는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새로운 세상을 체험할 수 있다.  알베르 카뮈는 연극(책)을 통해 우리는 제한된 삶을 살 수 있음에도 수 백, 수 천 번의 인생을 경험할 수 있다고 했다. 우리는 책을 읽음으로써 잠시 신에 버금가는 능력을 손에 넣는다. 원하는 때에 도달하기도 하고, 시간을 거스를 수 있으며, 때론 짧게, 반대로 길게 조정할 수 있다. 책을 읽는 사람들이 가끔 모든 것을 초월한 듯한 표정을 짓는 이유도 그들이 그에 버금가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랴. 반복되는 경험 속에서 우리는 어떠한 답을 찾는다.


  수많은 책 중에서도 에세이가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경험의 보편성 때문이 아닐까. 나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구나. 이 지점에서 오는 안도감은 쉬이 고민을 이야기하지 못하는 독자들에게 큰 힘이 되어준다. 그렇다면 소설의 역할은 무엇일까? 나는 우리가 쉬이 경험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소설의 역할이라 생각한다. 보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하는 우리 삶의 어둔 음지를 비추는 빛이 되어야 한다. 가구 밑 그림자에 플래시를 비추어야만 그 안에 살고 있는 바퀴벌레를 발견할 수 있다. 비추는 순간은 정말 끔찍하고 불쾌한 경험이지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조명을 비추어야 한다. 전원 버튼은 내 손에 쥐어져 있다. 그것을 경험할지는 내 손에 달려있는 것이다.


  우리 세대에게 감옥이라는 공간은 낯설다. 학생운동이니 교육대니 하는 단어는 너무 멀기만 하다. 옆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갇히고 경직된 사고를 강요받고, 그 안에서 목숨을 잃기도 하지만 그것은 국경 너머 다른 세상의 이야기다. 그래서 교도소에 수감된 야구선수가 운동하는 드라마까지 티브이에 나온 걸 지도 모르지. 어느샌가 수용소라는 공간은 웃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쳐도 될 것 같은 장소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놀라운 경험이었다. 잠시 우리는 시계 바늘을 반대로 감아 과거로 돌아간다. 자유가 없는 세상 한복판으로 떨어진다. 함께 유배된 슈호프의 뒤를 쫓아 우리는 수용소에 갇힌 죄인이 되었다. 점호와 노동이 우리를 기다린다. 눈 뜨고 나서 다시 눈을 감기까지 남자의 하루는 한 권의 책이 되었다.     


러시아 보르쿠타에 있던 수용소 내부 모습, 슈호프의 삶은 녹록치 않았다. / 게티이미지코리아


  감옥은 사람을 하찮게 만든다. 감자 덩이 하나에 시기 질투하게 만들고, 용맹한 군인을 겁쟁이로 만들며, 순박한 소년을 바보 멍청이로 만든다.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축축한 작업화만큼 사람을 질척이게 만드는 공간. 책은 그 공간을 너무나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처음에 읽을 땐 불편하다가도 말미에 슈호프가 소시지를 우물거리는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침이 고이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수용소의 죄인이 되어간다. 책을 읽고 있는 이 공간이 점점 불편하게 느껴진다. 딱딱한 의자와 손과 코 끝을 베는 매서운 바람. 저 멀리서 시베리아의 찬 바람이 불어와 소매가 감추지 못한 맨살들을 후빈다. 책의 묘사는 정말이지 쓸 데 없이 자세해서 읽는 사람을 저 먼 유배지로 던져 놓는 듯했다.    


  단순히 죄인이 되는 경험을 하기 위해 이 책을 읽는 것은 아니다. 책 속 등장인물 그 누구도 명백한 죄를 짓지 않았다. 포로로 잡혀서, 선물을 받아서, 종교를 믿어서, 또는 심부름을 했다는 이유로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 책이 말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수용소의 삶이 아닌 별 것 아닌 이유로 십 년형을 선고하는 이 기구한 현실이 아니었을까? 다시는 이런 현실이 직접경험이 되어선 안 되겠지. 책을 읽고 나서 허투루 감옥에 가겠다는 말을 아끼게 되었다. 감옥은 가선 안 되는 공간이다.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은 공간이었다. 간접경험일 뿐이지만 책은 나로 하여금 잔뜩 움츠러들고 조심스럽게 만든다. 마치 찬 바람에 옷깃을 여미는 하찮은 죄인처럼.


  작가 알렉산드로 솔제니친은 200쪽에 달하는 책 속의 길고 긴 하루를 8년 동안 반복하고 나서야 자유를 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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