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썸머 Mar 04. 2018

내가 다녀온 도시 H

오스트리아, Hallstatt

Hallstatt


흰 눈이 내릴 때는 온 세상이 아름다워 진다. 눈이 오는걸 좋아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 나는 눈은 할슈타트에서 맞았던 함박눈이다. 아무도 없는 거리에 눈이 올때 가만히 서있으면 눈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이미 쌓인 눈은 세상의 다른 소리를 흡수해 버린다. 그럴때 걸음을 멈추고 숨을 죽이면 그제서야 눈이 내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사람으로 북적이는 도시에서 눈이 오는 소리를 들을 기회는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


할슈타트에 방문했던건 크리스마스 직전의 한 겨울이었다. 크리스마스는 유럽인의 최대 명절인데다 이련 겨울에는 관광객으로 먹고 사는 마을에 방문객이 아주 뜸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할슈타트는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데 하루에 몇번 다니지 않는 탓에 점심때쯤 끊어지는 마지막 배를 간신히 탔다. 온 마을에 기념품 샵 한군데와 슈니첼을 파는 식당 하나 정도만 열려 있고 전부 닫혀 있었다. 문이 열린 다른 가게를 못찾은 걸 수도 있지만 대부분 열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게다가 눈이 엄청나게 왔다. 바람도 없는 산골짜기 마을에 눈만 조용히 쌓이고 있었다. 나와 사촌동생과 내 동생 이렇게 세명을 제외하고는 할슈타트에서 본 사람은 열손가락에 꼽을 수 있다. 물론 기념품점과 레스토랑 주인들을 다 포함해서. 마치 스노우글로브 안으로 빨려 들어온 것 같았다. 안그래도 비현실적으로 귀여운 마을에 사람도 없고 눈만 내리고 있으니 배를 타고 다른 차원으로 건너온 것 같았다.


눈속에 파묻힌 마을


우리는 신나서 마음대로 뛰어다녔다. 난간에 쌓여있는 눈을 뭉쳐서 눈싸움도 하고 눈이 잔뜩 쌓인 나무 밑에 서서 가지를 잡아당겨 눈을 왕창 맞기도 했다. 아무리 장난쳐도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우리끼리 웃고 떠들다 어느 골목에 갑자기 멈춰섰다. 셋중에 누가 멈추자고 했는지는 모르겠다. 걸음을 멈추자 마자 '가만 있어봐, 눈내리는 소리가 들려!' 라며 셋이 눈이 똥그래졌던 것만 기억난다. 눈이 내리는 소리는 처음이었다. 정적은 아니지만 아주 기분 좋은 소리였다. 눈끼리 서로 부딪히는 소리, 눈 위에 눈이 쌓이는 소리였다. 그렇게 아름다운 고요함을 할슈타트에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여행을 다녀온지 십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가끔씩 '우리 그때 할슈타트에서 눈 내리는 소리 들었던거 기억나?'하며 추억에 젖곤 한다. 그런 아름 다운 소리를 또 들을 수 있을까.


눈이 그치기도 했다
배를 타러 가는 곳. 할슈타트에 못갈뻔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다녀온 도시 F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