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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명현 Jun 01. 2016

에스 이 에스 혹은 엑소?

Initialism or Acronym?

 

 영화 <곡성> 리뷰를 완전 ‘삘 받아서’ 신나게 쓰고 있는 중이었다. 이 영화만큼 해석의 논란이 많은 영화가 또 있을까 만은 난 기본적으로 영화 <곡성>과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이 동일한 맥거핀(MacGuffin)을 썼다고 느꼈다. 그래서 어둡고 기괴한 오컬트 영화 <곡성>과 밝고 사랑스러운 팩션 사극 <성균관 스캔들> 사이를 오가며 부지런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중이었는데 한 페친으로부터 아래와 같은 질문을 받았다. 


 

 질문의 내용인즉슨, 아침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퀴즈를 푸는 시간이었고 답이 미국항공우주국이었는데 출연자가 ‘나사’라고 하지 않고 ‘엔 에이 에스 에이’ 로 읽은 모양이었다. 그러자 진행자가 크게 웃었다는데… 난 솔직히 이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좀 어이가 없다. 우리의 미스터 전, 요즘 중국어 광고 열심히 찍으시던데 영어 말고 중국어 하시면 어떨지? 괜히 남의 영어 가지고 웃지 마시고.    

 

 그런데 아주 공교롭게도 그 날 저녁 JTBC 뉴스룸에서 이성대 기자가 가수 설현이 속한 그룹 AOA를 아오라고 읽자 손석희 앵커가 “아오가 뭡니까?” 하고 이를 지적하는 장면이 나왔다. 순간 혈압이 오르고 분노 지수가 급상승했다. 작업 중이던 곡성 리뷰 창을 닫고 문서 창을 새로 열었다. 왜냐하면, 이건 영어 약어를 어떻게 발음하느냐에 따라 잠깐 웃을 수도, 살짝 타박할 수도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 한국인들의 무의식 속에 깔린 상대적 우월감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론상으로 짧고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영어 약어를 발음하는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 이니셜리즘(initialism)이라고 해서 각각의 알파벳 철자 그대로 발음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미연방수사국 FBI, 영국공영방송 BBC, 국제통화기금 IMF,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 MIT 등이 있다. 이들 단어는 에프 비 아이, 비 비 씨, 아이 엠 에프, 엠 아이 티 등으로 발음한다.     


 둘째, 애크로님(acronym)이 있다. 애크로님은 줄여 쓴 약어가 아예 한 단어로 굳어진 경우를 말한다. 대표적인 예로 미항공우주국 NASA, 석유수출국기구 OPEC, 국제축구연맹 FIFA 등이 있는데 이들 단어는 나사, 오펙, 피파 등으로 발음한다. 아래 리스트는 이니셜리즘과 애크로님을 이해하기 쉽게 따로 정리한 표다. 


 문제는 어떤 단어가 이니셜리즘에 해당하고 또 어떤 단어가 애크로님에 해당하는지 명확한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왜 같은 질병인데 SARS, MERS, AIDS 는 사즈, 머즈(한국에선 메르스로 발음), 에이즈라고 읽으면서 HIV 는 히브라고 읽지 않고 에이치 아이 브이 라고 읽는 걸까? 왜 같은 국제기구인데 OPEC 은 오펙이라고 읽으면서 IMF 는 임프라고 읽지 않고 아이 엠 에프 라고 하는 걸까? 왜 같은 학교인데 KAIST 는 카이스트라고 읽는 데 반해 MIT 는 미트가 아니라 엠 아이 티 일까? 


 여기서 잠깐, 우리의 기억을 되돌려 SES 가 혜성처럼 등장했던 1997년으로 가 보자. 어느 인터뷰에서 에스 이 에스 라는 이름이 어떻게 해서 나왔는지 질문한 기자가 있었는데 그때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멤버 셋의 이름 첫 자를 따서 완성된 것이란다. 리드보컬 바다 Sea 의 S, 유진 Eugine 의 E, 슈 Shoo 의 S – 이렇게 SES 가 탄생했다는 것인데 헐… 그러면 바다 Bada 의 B, 유진의 U, 슈의 S 를 합쳐 버스라고 할 것이지 웬 에스 이 에스? (라고 속으로만 생각했었다).     


 나중에 등장한 2NE1 도 마찬가지다. 21세기의 새로운 진화라는 뜻에서 투애니원이라… 미쿡에선 트웨니원 일지 모르지만 영쿡에선 트웬티원 인데… 이렇게 난해한 이름 말고 공민지, 박봄, 산다라박, 씨엘 – 이렇게 멤버들의 이름 첫 자를 따서 공산박씨 하면 얼마나 좋아? (라고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했었다). 


 원조 요정 에스 이 에스가 혜성처럼 등장한 지 15년 만에 남성 그룹의 종결판인 EXO 가 짠~ 하고 나타났는데 이번엔 이 엑스 오 가 아니라 엑소 란다. 아 진짜… 왜 얘네는 엑소지? 그동안은 에이치 오 티, 에스 이 에스, 쥐 오 디 였잖아. 짜증이 나려고 하네 (라고 속으로만 생각했었다).   


 사실 짜증을 낼 일도 아니다. SES 를 세스라고 하지 않고 에스 이 에스라고 정한 건 소속사 마음이니까. 이에 비해 EXO 를 이 엑스 오 라고 하지 않고 엑소라고 정한 것 또한 소속사 마음이다. 마찬가지로 NASA 를 나사라고 하든 엔 에이 에스 에이 라고 하든 그건 영어권 사람들 마음이고 특별한 규칙은 없다. 다만 영어권 국가에선 어떻게 발음하든 별 차이가 없는데 우리나라에선 반드시 지적을 당한다. 영어는 대한민국 땅에서 자국어도 아닌 외국어인데 말이다. 



 나의 첫 직장은 중앙일보 계열사였고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미국 타임사와의 협상 자리에 통역을 맡게 되었다. 협상 준비 기간 동안 나는 Time Inc. 를 타임 아이 엔 씨 라고 계속 발음했었는데 막상 협상 테이블에서 타임사 사장단은 타임 잉크 라고 하는 게 아닌가? 당시 L모 본부장이 타임 아이 엔 씨냐 타임 잉크냐 정확히 하라고 해서 나는 중간에 휴식 시간 때 인상 좋아 보이는 타임사 임원한테 살짝 접근했다. 그리고 물었다. 어떤 게 정확한 발음이냐고. 그의 대답은 이랬다. “I don’t know. Does it really matter?” 잘 모르겠는데,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그렇다! 타임 아이 엔 씨냐, 타임 잉크냐 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협상 내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사회에서 지금까지도 실속 없는 형식, 명분만 따지다가 속 빈 강정 같은 결과를 얻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손석희 앵커는 미국 미네소타에서 유학을 한 경험이 있으며 비록 더듬거리기는 해도 해외 인사들과 영어로 인터뷰하는 모습을 여러 번 보여 주었다. 전현무 아나운서는 명덕외고 영어과, 연세대 영문학과 출신으로 비록 최근에 중국어 학원 광고에 등장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영어를 잘 해야 맞는 사람이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백퍼센트 확신하건대, 손석희든 전현무든 또 그 어느 누구든지 다 이니셜리즘이나 애크로님이 뭔지 모르면서 다른 사람의 영어를 지적하는 거라고 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이건 학계에서 정식으로 인정하는 건 아니고 영어권 네티즌들 사이에서 오고 간 이론인데 굳이 따지자면 애크로님이 이니셜리즘보다 격이 더 높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애크로님은 옥스포드 사전에 올라간 정식 단어이지만 이니셜리즘은 아직 아니다. 그리고 이니셜리즘에선 그 어떤 알파벳의 조합도 가능하지만(그냥 붙여서 읽기만 하면 되므로) 애크로님처럼 하나의 단어로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약어가 완성됐다는 것은 자음과 모음의 배합부터 신경 썼다는 뜻이자 그 단어 자체에 이미 브랜드 파워가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서 에스 비 에스는 이니셜리즘이지만 스브스 뉴스는 애크로님이 된다. 그리고 스브스 뉴스의 슬로건은 다음과 같다. “SBS가 자신있게 내놓은 자식들” 그러니 에스 이 에스 보다 엑소가 격이 더 높다고 할 수 있고 같은 맥락에서 에이 오 에이 라고 발음한 손석희보다 아오 라고 발음한 이성대 기자는 이 걸그룹을 더 인정해 준 셈이 된다.    

 

 UN에 수많은 산하기관과 단체들이 있지만 유니세프만큼 인지도 높은 곳도 없다. 그리고 UNICEF는 이미 한 단어로서 애크로님이 되었다. 유엔환경계획 UNEP를 유 엔 이 피 라고 하지 않고 유넵으로 발음하는 것은 유니세프만큼 브랜드 파워를 키우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그러면 왜 나사(NASA)는 애크로님인데 비해 에프 비 아이(FBI)는 또 이니셜리즘인가? 우리가 꿈꾸는 완벽한 세상에 범죄자는 없다. 에프 비 아이나 시 아이 에이는 작을수록 좋은 조직이며 사실 아예 없는 게 가장 이상적이다. 그러나 우주를 향한 인간의 호기심과 탐구 정신은 범죄 없는 완벽한 세상에서도 지속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사는 엔 에이 에스 에이가 아니라 나사다. 


 그러면 USA나 UK 같은 국가 이름은 왜 또 이니셜리즘인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다시 전제조건으로 돌아간다. 전제조건은 이니셜리즘과 애크로님이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아직도 팽창하고 싶은 영미식 제국주의가 은연 중에 드러난 게 아닐까? 석유수출국기구 오펙에 가입할 수 있는 나라는 정해져 있지만 OECD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영어 약어 발음에 이렇게 심오한 논쟁이 오갈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영어권 사람들은 상대방이 발음을 어떻게 하든 신경 쓰지 않지만 자신들의 언어에 대해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논쟁한다. 우리는 정 반대다. 한국어에 대해 별다른 고민도 없고 별다른 논쟁도 없다. 그러면서 사소한 발음 하나 가지고 바로 지적질 들어가신다. 혹은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볼 때도 있고 아니면 비웃을 때도 있고… 상대방보다 자신을 드러내며 우월한 위치에 두려는 도구로 영어를 활용하려는 것은 한국 사회에 만연한 현상이기도 하다. 

 

 만약 청중의 관심을 모으고 시청률을 올리고자 일부러 의도한 연출이라면 (개인적인 생각은 이들이 상대방을 무시해서라기 보다는 분위기 전환용으로 ‘영어 지적질 기법’을 썼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본다) 앞으로 두 번 다시 이런 유치한 연출은 안 했으면 좋겠다. 손석희든 전현무든 각자의 영역에서 최고들이다. 굳이 싼티나는 저렴한 꼼수를 쓸 필요가 없지 않은가?

    

 유학 시절 영문학 시간에 이니셜리즘과 애크로님 수업이 끝난 후 그래서 결론이 뭐냐? 는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그때 선생님의 답변은 Let’s call the whole thing off! 였다. 감자를 포테토 라고 하든, 포테이토라고 하든, 토마토를 토마토라고 하든, 토메이토 라고 하든 즐겁지 아니한가? 제발 영어 발음 가지고 상대방보다 자신을 우월한 위치에 두려는 도구로 쓰는 것은 그만했으면 좋겠다. 우리네 인생은 너무나 짧고 사랑만 하기에도 부족하니 말이다. 



*덧붙이는 글 – Let’s call the whole thing off는 1937년 영화 <Shall we dance>에 삽입된 노래인데 다양한 발음을 대조하는 가사로 유명하다. 개인적으로는 Fred Astaire와 Ginger Rogers가 부르는 오리지널 버전보다 Louis Armstrong 이 부르는 1957년 버전을 더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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