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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명현 Jun 08. 2016

곡성 vs. 성균관 스캔들

자식 문제 앞에서 이성적인 부모는 없다

 

 팩트 하나. 내가 쓴 논문은 케임브리지 대학에 영구보존되어 있다. 단순히 이 사실만 놓고 보자면 내가 무슨 엄청난 학문적 성과를 이룬 것처럼 들리는데 실상은 이렇다. IGCSE 주관처인 케임브리지 대학에서는 각 학교마다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논문, 평균 점수를 받은 논문, 가장 낮은 점수를 받은 논문, 이렇게 3개의 논문을 발송해 줄 것을 요청한다. 왜냐하면 영국의 대입시험이라는 것이 우리나라처럼 사지선다 혹은 오지선다형 시험이 아니기 때문에 채점자의 주관적인 의견이 들어갈 수밖에 없고 따라서 어떤 기준으로 평가했는지, 점수차는 합리적인지를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해서다. 그러니까 IGCSE Coursework 를 영구보존한다는 뜻은 사실은 그냥 통상적인 업무였던 것이다. 


 물론 내가 쓴 논문은 가장 높은 점수의 표본으로 발송이 되긴 했는데 당시 역사 선생님이 유대계여서 약간 (혹은 많이) 이스라엘의 시각에서 중동분쟁사를 기술했다. 뭐, 이 정도 눈치야 사회생활 하려면 당연히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고 스스로를 합리화를 하면서 밸퍼 선언은 정당했으며 골다 마이어는 여신이며 6일 전쟁이 이스라엘의 승리로 속전속결로 끝나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를 400페이지에 걸쳐 자세히 썼는데 역사 선생님은 양손 엄지를 두 손 높이 치켜 올리며 Brilliant! 를 연발했다. 그리고 나는 Senior Prefect가 되었다. *IGCSE coursework, senior prefect 등은 일부러 번역하지 않았다. 좀 더 멋있게 보이려는 의도로.


 영화 <곡성>을 봤다. 영화평론가 이동진 씨가 10점 만점을 준 영화다. 팩트는 “그 모든 의미에서 무시무시하다” 라는 엄청난 찬사를 받았다는 거다. 하지만 조금만 차분히 들여다보면 수많은 평론가들의 찬사세례에 실체가 없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지금껏 엄청난 양의 리뷰가 쏟아졌는데 나는 평론가든 파워블로거든 <곡성> 관련 리뷰를 읽으면 읽을수록 공허함을 느꼈다.     


 곡성은 불친절한 영화다. 해석이 분분한 열린 결말은 차치하고라도 무슨 맥거핀이니, 오컬트니, 메타포어니, 샤머니즘이니, 부두교니… 안 그래도 난해한 영화인데 그 난해함을 설명해 준다는 리뷰 안에 온갖 전문용어가 등장한다. 곡성이 엄청난 영화라고 찬사를 쏟아내는 사람들의 글을 읽다 보면 머리에 쥐가 날 것 같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 드는 한 가지 의문은 왜 인간의 본성을 다루고 선악의 심연을 다루는 데 꼭 슬프고 어둡고 기괴해야만 하는지다. 밝고 경쾌하면서도 얼마든지 날카로울 수 있지 않은가? 찰리 채플린의 영화가 영원불멸의 고전인 이유는 코믹하면서도 정확하게 자본주의의 폐부를 찌르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난 이 영화에서 누가 죽고 누가 살았는지,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등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도대체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당최 알 수가 없기에 10점 만점을 준 영화평론가들이 무척 신기할 따름이다. 왠지 구름 저편 너머의 신선들 같아 단단한 땅 위를 밟고 사는 나 같은 보통 사람의 지력으로는 이해불가다.     


 끝없이 쏟아지는 곡성 리뷰 홍수 속에서 난 노아의 방주 같은 글을 찾아 헤맸다. 그러나 찾으면 찾을수록 혼란만 더 가중됐고 점점 더 물 속으로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난 그냥 내가 배운 대로 케임브리지 대학이 늘상 하는 것처럼 최저점과 최고점을 비교하며 그 점수차가 합리적인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그리고 여기서 최저점의 기준을 곡성으로 볼 때 정확히 대척점에 있는 최고점의 기준은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이다.     


 어둡고 기괴한 오컬트 영화 곡성과 밝고 사랑스러운 팩션 사극 성균관 스캔들 사이에 과연 무슨 연결 고리가 있고 어떻게 서로간에 비교 가능한 영역이 존재하는지를 찾아가는 나의 여정에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다. 구름 위 신선은 혼자 날아다니는 게 가볍고 편할 지 모르지만 단단한 땅 위를 한 발 한 발 걸어가는 여행객은 일행이 있어야 심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첫째, <곡성>은 곡성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대한 설명이 없다. 왜 하필 굳이 곡성인가? 한자만 살짝 바꿔서 제목 말장난하기에 안성맞춤인 동네라서? 황정민의 대사에서 곡성에 갑 중의 갑인 악마가 있기 때문에 이상한 일이 자꾸 벌어진다는 부분이 있는데 그런 악마는 평화롭고 조용한 시골 마을인 곡성이 아니라 저 북한 땅 함경도 요덕 수용소 쪽에 있어야 어울리지 않나?     


 <밀양>과 비교하면 곡성이라는 제목 선택 자체가 초라해 보이기까지 한다. 주인공 신애 역의 전도연은 남편이 죽자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하나 남은 아들과 함께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온다. 밀양의 영어 번역은 Secret Sunshine 으로 지구상 어디에나 있는 태양을 비밀스러운 햇볕으로 만들어 내적인 치유과정이라는 중의적인 뜻도 담고 있지만 왜 밀양인지에 대한 확실한 설명을 하고 영화를 시작하는 것이다. 여기에 영화 초반부 송강호의 대사 “여는 뭐 맨날 한나라당이고” 는 정치적으로 단순한 동네인 밀양이 역설적이게도 앞으로 복잡하게 전개될 신애의 삶을 암시한다.     


 반면 <성균관 스캔들>은 드라마의 배경이 반드시 성균관이어야만 했다. 여주인공 박민영은 똑똑하고 씩씩하기 그지없지만 여자라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남장을 하고 저잣거리에서 문서 대필, 고전 필사 등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근근이 살아간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남주인공 박유천과 얽히면서 성균관에 들어가게 된다. 당대 최고의 교육기관이자 금녀의 구역에 여자가 들어간다는 설정 자체가 엄청난 스캔들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성균관 스캔들은 최고의 제목이다. 


 사실 성균관은 곡성 이상으로 폐쇄적인 공간이다. 일단 여자는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인구의 절반이 배제된다. 여기에다가 양반만 들어갈 수 있고 양반 중에서도 집안 좋고 머리까지 좋은 엘리트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극소수에게만 허락된 공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균관은 당시 조선시대를 거울같이 보여주는 곳이자 그 사회를 대표하는 작은 세상이다. 기득권인 노론 세력에게 대항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원칙과 이상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에게 얼마나 큰 희생이 요구되는지, 고착화된 진보는 오히려 보수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성균관 유생들의 일상을 통해서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둘째, 주인공의 자의식 형성에 있어서 곡성과 성균관 스캔들은 완벽한 대척점에 있다. 곡성의 주인공 곽도원은 남성성을 잃어버린 인물이다. 기가 센 여자들만 가득한 집안에서 혼자 남자인데 장모 앞에서도 부인 앞에서도 어린 딸 앞에서도 빌빌댄다. 영화 초반부가 코믹하게 흘러가는 것은 주인공의 이런 면을 보여주는 에피소드 때문이다.     


 곽도원은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도 장모의 밥 먹고 가라는 말을 거절 못 한다. 그래서 밥을 다 먹고 출근해 결국 일터에 지각을 하게 되고 상사한테 혼나고 직장 동료들한테 왜 이렇게 늦게 왔냐는 원성을 듣는다. 상사는 또 여기에 결정타를 날린다. “쟈가 기집애 같아서 그려.”     


 무섭게 생긴 장모에 비해 부인은 얌전하게 생겼지만 결코 만만치 않다. 쭈그려 앉은 채 빨래를 하면서도 남편을 한심하게 혹은 묘하게 쳐다보는데 얼마나 부인 눈치를 보고 살았으면 주인공은 그게 무슨 뜻인지 단박에 알아챈다. 그래서 일부러 밖으로 나가 차를 세워 두고 그 안에서 부인을 위해 열심히 봉사를 했건만 별로 좋은 소리도 못 듣는다. 옆집 남편은 그렇게 힘이 좋다는데 당신은 왜 이 모양이냐는 핀잔만 듣고… 부부 관계 직후 바로 남편과 다른 남자를 비교한다라, 부인도 참 특이한 여자다. 이렇게 매너 없는 혹은 막돼먹은 여자를 곽도원은 어쩌지 못한다. 그저 보약이나 다려 달라고 하는데 이 장면을 또 딸한테 들킨다.     


 분명 엄마랑 아빠랑 둘이서 관계를 가졌건만 딸 눈치를 보는 건 아빠 혼자다. 아빠는 어린 딸한테 이것 저것 사 주면서 섹스가 존재하는 어른들의 세계에서 그런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동화의 세계로 인도하고 싶어하지만 영악한 딸은 아빠한테 받을 거 다 받아먹고 나서 돌직구를 날린다. “괜찮혀. 이번이 처음 본 것도 아닌데 뭐.”   

  

 곽도원은 장모, 부인, 딸도 모자라 하다 못해 동네 미친 년(천우희) 한테도 말빨이 안 먹힌다. 영화 초반부에 천우희가 곽도원을 향해 계속 돌을 던지는데도 그는 전혀 제재를 가하지 못하고 그냥 계속 하지 말라고 ‘말하기’만 한다. 물론 천우희는 이를 무시하고 계속 돌을 던진다. 그는 여자들 사이에 섬처럼 갇힌 존재다. 


 

 반면 성균관 스캔들에서 주인공 박민영은 스스로 여성성을 거세한 채 금녀의 구역 성균관에 들어가 열심히 공부한다. 공부만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활쏘기 대회에 나가서 상도 타고 당대 최고의 기녀에게서 사랑도 받는다. 모든 사내의 로망인 초선이를 어떻게 사로잡았는지 궁금하기만 한 다른 성균관 유생들은 그들 나름대로 지레짐작해 ‘대물’이라는 별명도 붙여준다. 사방팔방 남자들한테 둘러싸여 매순간 여자임이 발각될까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은 긴장된 상황 속에서도 박민영은 오히려 상황을 주도하며 폭풍의 핵 같은 존재감을 과시한다. 



 셋째, 곡성에서는 내용 전개상 중간에 등장하는 이이제이(오랑캐는 오랑캐로 다스린다는 사자성어)에 대한 설명이 없다. 마을에서 괴상한 일이 자꾸 벌어지자 사람들은 외지에서 온 일본인 때문이라며 다들 수군댄다. 그런데 이 문제를 내부적으로 해결하려 하기 보다는 또 다른 외지인을 끌어들여 외지인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그래서 박수무당 황정민이 짠 하고 나타나는데 개인적으로 영화 전체에서 이 부분에 대한 설명 부재가 가장 아쉽다.     

 외지인이 모든 문제의 원흉이라고 하면서도 정작 문제 해결은 또 다른 외지인을 통해 간편하게 처리하려는 모습이 좀 더 부각되었다면 인간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다룬 명작이 될 뻔했는데 나홍진 감독은 실제 인터뷰에서 그저 천우희 장면이 감독판에 추가될 거라고만 말했다. 내가 보고 싶은 건 천우희나 황정민, 일본인의 정체가 아니라 그들 캐릭터들의 조합을 통해서 그려지는 인간사회였는데 말이다.    

 

 작금의 새누리당 상황을 한번 살펴보자. 총선에서 참패를 겪은 뒤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이를 내부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반기문 카드를 쓰려고 한다. 참 한심한 일이다. 하지만 아마도 우리들 대부분에겐 이런 새누리당을 비난할 권리가 없을 것이다. 다이어트가 나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모르는 사람이 없겠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외부에서 해결책을 찾으려고 한다. 세상의 수많은 다이어트 클리닉과 전문가들이 밥벌어먹고 사는 이유는 인간의 이런 본성 때문이다. 


 다시 성균관 스캔들로 가 보자. 정조는 금등지사를 찾는데 성균관의 귀한 인재들을 저 세상으로 보낸 아픈 상처가 있다. 그런데 그는 또다시 성균관의 유생들을 활용해서 금등지사를 찾으려고 하고 이 부분에서 정약용과 갈등을 겪는다. 하지만 기득권 세력인 노론의 틈바구니 속에서 정조가 기댈 곳은 똑똑하면서도 아직 순수한 성균관 유생들 밖에 없었다. 그들을 기득권 세력에 맞설 신흥 세력으로 길러내는 것이 정조의 유일한 카드였기 때문에 정약용은 결국 정조에게 순종한다.     


 이렇게 선발된 조선의 F4 박민영, 박유천, 송중기, 유아인은 정조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지만 놀라지 마시라. 드라마 후반부에 금등지사를 둘러싼 엄청난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슈렉을 능가하는 반전이다. 마지막에 정조를 향해 쏟아내는 박유천의 대사에 소름이 돋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으로 확신한다. 



 넷째, 문제 해결 방식에서 곡성과 성균관 스캔들은 완전히 갈리게 된다. 모든 문제의 원흉이 일본인이라고 확신한 곽도원은 동네 지인들을 모아 무작정 일본인의 집으로 쳐들어간다. 마을에 연쇄적으로 일어난 그 공동체의 사회의 이슈를 개인적으로 해결하려 든 것이다. 곽도원의 직업이 경찰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참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반면에 성균관 스캔들에서는 신해통공이라는 구조적 해결 방법을 보여준다. 시전상인과 난전상인이 함께 상생할 수 있도록 사회적 문제에 제도적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서로 상생할 수 있도록 방안을 마련한 것인데 이건 몇몇 심성 착한 기득권 세력이 불쌍한 사람을 개인적으로 도와 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21세기 한국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보통 사람들에게 특급 사이다를 안겨주는 통쾌한 장면이기도 하다. 


 사실 멋있는 정치인도 많고 멋있는 재벌도 많은데 왜 그렇게 정치판은 그 모양이며 대기업 횡포 때문에 못살겠다는 중소기업은 왜 그렇게 많은 것일까? 이건 개인적으로 해결할 일이 아니다. 곡성의 주인공 곽도원처럼 친구들이랑 낫 들고 일본인의 집을 쳐들어 간다고 해서 해결되는 일이 아니란 뜻이다.     


 다섯째, 영화의 첫 포문을 여는 오프닝과 대미를 장식하는 클로징에서 왜 굳이 누가복음을 인용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그리고 누가복음을 인용한 것 자체가 너무 촌스럽다. 만약 악의 평범성과 인간의 무능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면 차라리 역대하 15장 5절이 더 나았을 것이고(그 때에 온 땅의 모든 주민이 크게 요란하여 사람의 출입이 평안하지 못하며) 혹은 의심과 확신의 모호한 경계를 이야기하고 싶었다면 로마서 9장 32절이 더 나았을 것이다(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곡성은 무슨 까마귀니 금어초니 하다 못해 밥상 위 생선 반찬에도 온갖 중의적 의미가 가능하게 해 놓았으면서 왜 하필 성경 인용은 예수와 제자들의 만남을 직접적으로 묘사한 누가복음인가? 내 느낌엔, 그 옛날 내가 학창시절에 역사 선생님께 잘 보이려고 이스라엘의 관점에서 중동분쟁사를 기술했던 것 같이 나홍진 감독이 깐느 영화제에서 서양인들에게 잘 보이려고 무리하게 성경 인용을 한 것 같다. 난 그래도 400페이지에 걸쳐서 자세히 설명한 무척 성실한 학생이었는데 나홍진 감독은 너무 불성실하다. 설명이 없다. 


 성경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책이자 그 자체로 기준이다. 고전 중에서도 너무 고전이라는 뜻이다. 함부로 인용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성경을 인용해서 본전도 못 건진 영화들이 수두룩하다. 내가 <다빈치 코드>를 싫어하는 이유는 그 영화가 성경을 왜곡해서가 아니라 성경을 너무 어설프게 인용해서다. 예수가 사실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었으며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다는 설정은 작가적 상상력 안에서 얼마든지 용인될 수 있는 문제라고 본다. 그런데 그런 파격적인 상상력을 펼치려면 그에 걸맞는 논리적 전개가 펼쳐져야 맞는데 두 시간이 넘는 상영 시간 동안 인용되는 성경 구절은 달랑 하나, 욥기 38장 11절이다. 그것도 파도가 넘어가지 못한다는 뜻을 주어의 인칭을 잘못 바꿔서 인용했다. 영어로 들으면 실소가 나온다. 이 부분은 차라리 한국어 번역이 백배 나은 것 같다. 우리말은 주어를 따로 구분하지 않아도 말이 통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말이다. 



 성균관 스캔들은 그렇지 않다. 드라마 중간중간 논어 인용이 너무나 절묘하다. 맨살에 착 감기는 실크처럼 뇌에 착 달라붙는다. 그리고 드라마 후반부에 유아인이 정약용의 시를 인용하는 장면에서는 눈물이 왈칵 나온다.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다.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에 분개하지 않는 시는 시가 아니다.   

선을 권장하고 악을 경계하는 뜻이 없으면 그 또한 시가 아니다.  

   

 비단 시만 그럴까?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에 분개하지 않는 예술이 과연 예술인가? 아니다. 자기 잘난 멋에 함부로 재능의 칼을 휘두르다가 다른 사람을 베는 무기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종교는 또 어떤가?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에 분개하지 않는 종교는 예수를 팔고 부처를 팔아 한몫 챙기는 이익 집단에 불과하다. 그럼 정치는?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에 분개하지 않는 정치는 약자의 피를 밑천으로 권력이라는 수익을 불리는 그저 합법적인 도둑들일 뿐이다. 



 그런데 이 모든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곡성과 성균관 스캔들은 이야기의 출발점이 동일하다. 비실비실 하면서도 독버섯 때문일 거라고 합리적인 의심을 하던 곽도원은 딸이 아프게 되자 모든 이성적 판단을 던져 버린다. 그리고 딸을 살리기 위해서 고군분투한다. 천 만원짜리 굿도 망설이지 않고 강행하며 일본인이 문제의 원흉이라고 생각하자 경찰복을 벗어던지고 그를 직접 단죄하러 나선다.     


 곡성에서 첫 살인사건이 일어났을 때 천우희가 이미 쳐 놓은 금줄 위로 노란색 폴리스 라인이 쳐진다. 비이성적이고도 초자연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경찰로 대변되는 공적인 권위와 합리성을 가지고 접근하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딸이 아프게 되자 폴리스 라인이 아닌 금줄을 찾게 된다. 치유의 기적을 기대하기보다는 큰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보라는 곡성 성당 노신부의 말도 들리지 않게 되고 오히려 답답하게 느끼게 된다. 계속 이성적이던 젊은 부제조차 본인과 친인척 관계에 있는 사람이 아프게 되자 직감에 따라 움직인다.     


 성균관 스캔들에서 여주인공이 금녀의 구역에 들어가게 된 것도 집에 아픈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절대 안 된다며 극구 반대하던 어머니는 성균관 유생은 약재를 공짜로 얻을 수 있다는 말에 무너진다. 그래서 누나 김윤희가 남동생의 호패인 김윤식을 가지고 성균관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한다. 약이 필요한 아들 앞에서 어머니가 고집스럽게 지키던 원칙은 사라진다. 


 자식 문제 앞에서 이성적인 부모는 없다. 소설가 김홍신은 어느 TV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인간이 영생하는 방법에 2가지가 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하나는 자식을 낳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본인의 이름으로 예술 작품을 남기는 것인데 그의 말처럼 자식을 잃는다는 것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영생으로의 좌절이다. 또한 다음 세대에 대한 모든 희망의 증발이다.    


 오죽하면 자식을 잃은 부모를 지칭하는 단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부모를 잃으면 고아다. 남편을 잃으면 과부다. 부인을 잃으면 홀아비다. 그런데 자식을 잃은 부모는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니, 상상할 수조차 없는 그 슬픔과 고통을 어떤 단어 하나로 규정할 수 있을까?     


 성균관 스캔들의 시대적 배경이 조선 후기 중에서도 정조 때라는 게 참 의미심장하다. 정조의 할아버지인 영조는 자식을 잃었다. 그것도 무슨 사약을 내리거나 칼로 목을 베는 참수형이 아닌 뒤주 속에 가둔다는 기상천외하고도 엽기적인 방법으로 말이다. 사도세자가 정말 개망나니였는지, 아니면 정치적 희생양이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유야 어찌 됐든 영조는 죽은 아들에게 ‘생각 사’와 ‘슬플 도’라는 시호를 하사하며 애끓는 마음을 표하고 정조를 위한 정치적 카드를 준비한다. 금등지사란 자식을 잃은 영조가 아비를 잃은 정조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었다. 


 그렇다면 역으로 아비를 잃은 박근혜 대통령은 자식을 잃은 국민들에게 뭘 해 줄 수 있을까? 조선사 전체에서 가장 비극적인 방법으로 아비를 잃은 정조와 한국 현대사 전체에서 가장 비극적인 방법으로 아비를 잃은 박근혜 대통령이 정확히 200년이란 시간을 사이에 두고 이 땅에 등장했다는 것은 역사의 우연이겠지만 그 우연을 필연적인 치유의 기회로 삼는 것은 박근혜 대통령의 몫이다.    

 

 우선 세월호라는 거대한 이슈가 있고 세월호 이전에 경주 마우나 리조트 붕괴사고가 있었다. 신입생 환영회를 갔던 부산외대 학생들 중 10여 명이 폭설로 쌓인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강당의 지붕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었다. 대학 합격의 기쁨을 채 누리지도 못하고 그렇게 허망하게 어린 친구들이 사라졌다. 우리 아들, 우리 딸 이번에 대학 들어갔다며 자랑할 새도 없이 자식의 부고 소식을 돌려야 했을 부모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공식 사망자수 200여명 중 절반 이상이 영유아다. 폐가 딱딱하게 굳어 죽어가는 신생아들을 바라보며 부모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23년간 곱게 키운 딸이 대한민국에서 최고 번화가라는 강남의 한복판 화장실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부모 마음은? 지하철 스크린도어를 고치며 받는 월급 144만원 중 매달 100만원씩을 대학 가겠다고 학비를 모으던 성실한 아들이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부모 마음은? 그리고 그 아들의 가방에서 채 먹지 못한 컵라면이 나왔을 때의 마음을 누가 짐작할 수 있을까?   

  

 자식을 잃은 수많은 아비, 어미들의 곡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한 수준을 넘어서 눈에 보이는 것 같다. 제발 바라건대, 이들의 형상화된 곡성 앞에 어떠한 논리나 합리성을 가지고 접근하지 마시라. 그냥 따뜻하게 안아 주시라. 자식을 잃은 부모는 결코 이성적이지 않으며 이성적일 수도 없다. 자식 문제 앞에선 그 누구라도 폴리스 라인이 아닌 금줄을 찾기 마련이며 그 누구라도 원칙을 접고 호패를 바꿔 달 수 있기 때문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말조차 사치스러운 세상에서의 작은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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