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넷
나에게 봄은 문이 열리듯 찾아온다.
꽃 문이 열리고, 잠자던 생명에 눈이 열리고, 얼었던 땅에 틈이 열릴 때 나 역시 겨울 동안 닫아둔 작업실 창을 연다. 볕과 바람이 방으로 드는 걸 보고 있으면 그것들이 공간을 넘어 내 마음까지 닿는 게 느껴진다. 그 순간은 여유롭다.
나이가 들어도 매해 봄은 새롭다.
이 새로움은 지금까지 나를 거쳐간 수십 번의 봄을 잊은 까닭일까 싶지만, 막상 꽃나무 아래 서면 지난봄 기억이 난다. 아마도 매해 봄마다 이렇게 꽃나무를 올려다보기 때문일 테다.
이때 떠오르는 기억들은 사소하다. 봄이 되면 걸었던 길과 같이 걷던 사람의 옆얼굴, 주고받았던 말과 그 사람 얼굴로 비추던 햇살 같은 것들이다. 특별한 사건은 아니지만 돌아보면 그 사소한 기억들로 마음을 다지며 한 해를 살아냈다.
꽃을 보고 있으면 맨 처음 계절에 이름을 지은 사람은 누구였을까 궁금해진다.
왜 계절을 넷으로 나누었는지, 그 사람이 유목민이었는지 정착민이었는지도 알고 싶다. 그때엔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던 시기가 지금보다 훨씬 생존이 걸린 문제였을 테니, 내가 느끼는 봄과는 사뭇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 봄에도 꽃은 피었을 테고, 그 꽃은 그들에게 어떤 의미였을지 궁금하다.
우리말 '봄'의 어원에는 여러 설이 있다.
'볕'을 뜻하는 '볻'에 '오다'의 용언인 '옴'이 붙어 '봄'이라는 것과 '보다'에서 '봄'이 왔다는 설도 있다. 나에게 두 어원 모두 아름답고 뜻있어 보인다. 그때와 지금의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해도 같은 태양 아래 있음은 변함없다. 그들이 쬐었던 볕을 나도 쬐고 있다고 생각하면, 내 기억이 아주 먼 곳까지 닿아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이번 봄에는 몇 가지 꽃 이름을 외웠다.
주로 같이 산책하는 여자 친구와 엄마가 꽃을 좋아한 까닭이다. 새로운 꽃이 보일 때마다 이름을 알려줬고, 그중 몇을 기억하게 됐다. 금계국, 괭이밥, 금낭화.
글을 쓰는 동안 모양과 색이 모두 떠오르는 것이 있고, 어렴풋이 기억되는 것도 있다. 어떤 꽃은 작년에도 봤지만 올해 이름을 알게 된 것도 있다. 관계란 신비하게도 이름을 부르면 더 가까워진다. '노란 꽃'이라 부르는 것과 '금계국'이라 부르는 건 거리감이 전혀 다르다. 마치 새로운 사람을 만나 인사를 하고 이름을 듣고 악수를 나누는 일처럼, 이 계절의 한 부분과 내가 손을 잡은 것 같다.
내년 봄이 되면 올해 외운 꽃 이름 대부분을 잊을지도 모르겠다.
꽃이 피고 지는 것처럼 기억도 그러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매번 찾아오는 봄은 나에게 망각이자 남겨진 기억을 확인하는 시기다. 많은 걸 잊고 몇 가지를 기억하며 다시 꽃나무 아래 서서 문을 여는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