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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원진 Jun 28. 2021

피고 지고_2

열여섯

봄을 '꽃이 지는 계절'로 바라보는 이는 자우림의 '김윤아'다. 

그녀는 돌아보는 사람이다. 수많은 신화 속 인물처럼. 돌아보면 소금기둥이 된다는 걸 알면서도 돌아보고 걷다가 다시 돌아본다. 신화에서 이들은 모두 죽거나 갇히거나 영영 돌아오지 못할 운명에 처했지만 바로 그 이유로 이야기가 됐다. 커트 보니것이 <제 5도살장>에 썼듯 그것은 너무 인간적인 선택이기 때문이다. 


<스물 다섯, 스물 하나>는 곡 제목부터 묘한 구석이 있다. 일반적인 제목이었다면 순서대로 '스물 하나, 스물다섯'이 더 자연스러웠을테다. 어감 상 순서를 바꿈으로써 멜로디와 더 잘 붙는 이유도 있을 것 같고, 더하여 그녀가 세상을 보는 방식도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싶다. 앞서 말했듯 그녀는 뒤돌아 과거를 바라보며 노래를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곡은 '지금' 꽃잎이 떨어지는 순간에서 시작하여 스물다섯, 스물 하나로 점차 과거로 밀려 나아가는 구조처럼 보인다. 이 곡을 들을 때면 플래시백 구조를 가진 단편 영화과 머리에 그려지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또한 예전에 사용했던 스마트폰을 다시 켜고, 그 속에 저장된 사진과 영상을 훑어보는 느낌도 준다. 그 속에 있는 사람과 꽃과 봄이 생생히 살아있는 것처럼 보인다해도 그것을 보는 나는 결코 그 때에 닿을 수 없는 것처럼, 이 곡의 닿지 않는 것을 향해 손을 뻗고 있다.

   

바람에 날려 꽃이 지는 계절엔, 아직도 너의 손을 잡은 듯 그런 듯 해

그때는 꽃이 아름다운 걸, 지금처럼 사무치게 알지 못했어  



그때, 꽃이 아름다운지 몰랐던 건 아마도 젊었기 때문일 것이다.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는'(이상은, 언젠가는)'것처럼, 내가 그 자체로 꽃이었을 땐 그 싱싱한 젊음과 넘쳐흐르는 생기를 알기란 쉽지 않다. 숲 전체를 보기 위해선 숲에서 걸어 나와야 하듯, 젊은 날의 아름다움을 알기 위해선 젊음과 멀어져야 한다. 



하지만 멀어질수록 기억은 불완전해진다. 마치 짧게 잘린 여러개의 영화 필름 조각들 같다. 어떤 기억은 앞부분이 유실됐고, 어떤 기억은 영상 없이 소리만 남았으며, 또 어떤 기억은 여러 장의 필름이 겹쳐 놓은 것처럼 시간과 장소, 이름과 표정이 뒤섞여 있다. 화자는 이런 기억의 속성을 다시 한번 흩날리는 꽃잎에 비유한다. 맨 처음 떨어지는 꽃잎에서 손을 잡았던 때로 나아갔던 곡은, 이제 그 기억 전체를 떨어지는 꽃잎으로 바라본다.



너의 목소리도 너의 눈동자도 애틋하던 너의 체온마저도 

기억해내면 할수록 멀어져 가는데 흩어지는 널 붙잡을 수 없어



나에게 김윤아가 다른 아티스트들과 구별되는 건, 데뷔부터 지금까지 줄곧 영원을 꿈꾸고 좌절하기를 반복한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창작자는 나이가 들며 다루는 주제도 변하기 마련이다. 안정과 사회적 위치, 더하여 가정까지 꾸리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에 걸맞게 다루는 이야기가 변모한다. 난 이게 나쁘다고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김윤아는 이 모든 것에 해당되면서도 여전히 영원한 것을 향해 달려들어 좌절하고, 또 그 좌절한 상태를 노래한다. 김윤아가 쓴 가사처럼 그녀 가슴속엔 멎지 않는 폭풍이 치는 것만 같고(이 가슴속의 폭풍은 언제 멎으려나. 바람 부는 세상에 나 홀로 서있네, 샤이닝), 밀랍으로 이어붙인 날개가 떨어질 걸 알면서도 태양을 향해 달려드는 것 같다.(난 내가 스물이 되면 빛나는 태양과 같이 찬란하게 타오르는 줄 알았고, 이카루스)  



영원할 줄 알았던 스물다섯, 스물하나.   



어쩌면 그녀의 창작 동력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영원하리라 믿었던  순간'이 아닐까 싶다. 김윤아가 이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매우 드라마틱하다. 무대 위 그녀를 떠올려 보라. 그녀는 이런 좌절을 노래할 때 가사와는 상반된 태도를 취한다. 김윤아만이 가진 독특한 아우라는 이 태도에서 만들진다. 자신이 갈구하던 영원에 닿지 못했음에도 움츠려 들지 않고 당당하게 턱을 치켜든다.  

예컨대 다음 계절이 오면 이야기할 '이소라'에겐 자기 파괴적인 면이 있다. 몸을 낮춰서 구애하고 애원하며 심지어 순종한다. 난 이 역시도 사랑의 한가지 방법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김윤아가 만든 곡 속에 화자와 무대 위 그녀는 이런 식의 자세를 취하지 않는다. 추락할 걸 알면서도 꼿꼿하게 날개를 펼치고 있다.



자우림 혹은 김윤아의 팬이라면 '스물다섯, 스물 하나'가 발매되기 12년 전(2001년) 이미 봄에 관한 곡 '봄날은 간다'를 만들었음을 알 것이다. 난 두 곡이 동어반복이라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그 시간 동안 한 가지 감정 품은 채, 다른 방식으로 꺼내어 노래했다고 느낀다. 그러기에 다시 10여 년이 지난 후에도 그녀가 꽃이 지는, 봄날이 가는 곡을 만들지 않을까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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