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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성 Nov 27. 2023

백마리 개, 싫증

20. 나에게 싫증이 날 것만 같았다.

새벽 비가 전부라고 했다. 안심하고 잠든 것이 실수였다. 점심까지 비가 주적 내렸다. 늦잠은 아니었지만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다 출근이 늦었다. 다가오는 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축축하지 않았다. 어디선가 비를 피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이라 더 미안했다.




일하기 싫다. 비가 오는 날은 그렇다. 굳이 이유를 찾으면 그렇다. 맑은 날이었어도 그랬을까? 번아웃이라고 핑계를 내밀었을까? 아무 이유 없다. '일하기 싫은 날'은 이유를 찾는 것조차 하기 싫은 날이다.


겨울비가 때로는 반갑다. 흐린 날은 춥지만 비 내리는 날은 따뜻하기 때문이다. 구름 위에서 햇살을 받은 물방울이 비로 떨어져서 그럴까? 말도 안 되는 상상이 저절로 피어난다. 일하기 싫은 날이면 더욱 그렇다.


가만히 앉아 내리는 비를 맞고 불어오는 바람에 등을 돌렸다. 등 돌리지 않은 개들과 눈이 마주쳤다. 눈 뜨기 힘든 거센 바람 속에서도 녀석들은 등 돌리지 않을 것이다. 개를 돌본다는 사람이 스스로 돌보는 것조차 버겁다. 누가 누구를 돌보는 것인가? 일하기 싫은 날이면 녀석들 시선이 더없이 불편하다. 미안해서 그렇다.




매일이 똑같다. 자고 일어나는 시간은 매번 다르지만 이후 순서는 똑같다. 개똥을 치우기 시작하고 밀대질을 끝내는 장소조차 매번 같다. 루틴을 만든 적 없지만 이를 벗어난 적도 없다. 효율을 높이기 위한 선택도 아니었고, 본연의 업무에 충실하기 위한 목적일리도 없었다. 잠시 쉬어가는 시간도 항상 오후 3시쯤. 그때서야 루틴에서 벗어나 먹을 것을 찾아간다.


하기 싫으면 멈춘다. 기본적인 일은 멈출 수 없기에 한다. 매일 매년 했던 일을 줄인다고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기본적인 일을 조금 더 잘 해내려는 일만 멈출 뿐이었다. 몸이 쑤시고 머리가 멍해질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대낮에 누워 저녁까지 잠을 잘 때도 있었다. 어떤 날은 개들 밥도 주지 않고 넘어가기도 했다.


하루를 버티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반복적으로 해내는 일들이 모여 큰 일을 이룬다는 말에는 흥미 없다. 필요한 일들이 모여 필요한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현재 시점의 내가 미래의 목적을 설정하는 것이 가능할 리 없다. 내일의 변수를 고려하지 않고 제대로 된 목적이 될 리 없다. 그래서 하루를 버티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실망스러운 일들이 이어진다. 그보다 내가 실망하기를 바라며 실망스러운 일들을 벌인다. 제대로 된 하루를 보내지 않거나 필요한 일들을 외면하는 짓이 그렇다. 너무 오래 걸리지만 않기를 바랄 뿐이다. 경험상 3일이 적당했다. 제대로 된 일이 하고 싶어지면 그때서야 몸이 움직인다. 지난 며칠 동안 미룬 일들을 반나절 만에 끝낸다.


개들에게 미안한 하루는 이리 마감된다. 20살부터 자기 계발서만 줄구장창 읽어왔다. 보람된 하루를 보내는 방법이 대부분이었다. 그것이 내 목표였다. 많은 일들을 해내는 것이 정답인지 알았다. 효율적인 시간 활용법을 다룬 책들이 그렇다고 했다. 아니었다. 그저 여기 개들에게 미안하지 않은 하루가 되었으면 했다.


버티는 하루는 핑계였다. 열심히 노력했다는 변명에 불과했다. 꽃을 보기 위해 화분에 옮겨 심고서는 물을 주지 않는 꼴이 반복되었다. 주변을 청소하고 정리했다. 간단한 이 두 가지를 종일 반복했다. 그리고 오후 3시가 되어 잠시 쉬어가면 그때서야 보였다. 개들이 백마리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개가 없는 것처럼 반나절을 미친 듯이 뛰어다닌 나에게 싫증이 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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