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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곰 Oct 07. 2024

콘 구스또(Con Gusto)

이토록 기다린 순간

 약 800km 기나긴 여정이 얼마 남지 않았다. 20일 동안 500km가 넘는 길을 걷고 카미노는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시절인연' 게 정말 존재할까? 인생의 찰나에 불과 한 스무날 남짓한 날이지만 많은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웃으며 걷다 보니 이 순간들이 다시는 오지 않을 소중한 시간임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다시 오지 않을 순간 후회하지 않기 위하여 노란 화살표가 산티아고 길을 알려주듯 마음의 노란 화살표를 따라 스스로에게 조금 솔직해지기로 했다. 하루 만에 변덕을 부린 내가 부끄럽고 창피하긴 했지만 놓치고 후회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란, 그 말을 기다렸어. 정말 고마워."


 그들의 두 눈은 처마 밑에 대롱거리는 빗방울처럼  맑고 투명하게 빛이 났다.  크리스티앙의 하늘색 두 눈동자에는 눈물이 살짝 고이기도 했다.  눈이 부시도록 환한 미소를 짓는 크리스티앙과 키캐의 모습에 조금 겸연쩍은 미소밖에 지을 수가 없었다.


 설렘반 걱정반이었지만 마음이 시키는 대로. 파울로코엘료처럼 길에서 주는 표지를 따라, 사람이 주는 표지를 따르기로 했다. 우리는 함께 걷기로 한 날 함께 아침을 먹고 걷기로 약속했다. 주방으로 들어가니 이미 크리스티앙은 점심 도시락을, 키캐는 아침 준비를 거의 다 마친 상태였다. 약속된 시간에 분명 늦지 않게 도착했지만 나보다 서두른 친구들 덕분에 지각한 기분이었다. 당황하여 멀뚱히 선 채로 아침인사를 건넸다.


"부에노스 띠아스! 키캐, 크리스티앙. 하 와 유?"

"굿모닝 아란! 앉아."


 촌스러운 잔꽃무늬 식탁보가 깔린 4인용 테이블 커트러리가 세팅되어 있었고 미안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지 못하고 도시락을 싸는 크리스티앙에게 다가간다. 우리는 서로의 영어와 스페인어 실력을 생각해서 눈을 바라보고 최대한 천천히 또박또박 말을 했다.


"크리스티앙, 미안해..  늦잠을 잔 건 아닌데.. 혹시 뭐 도울 거 있을까?"


"아란, 오늘은 우리가 같이 걷는 첫날이잖아. 아침을 차려주고 싶었어."


 우리의 구세주 키캐가 통역을 해주었다.  키캐가 통역을 해줄때, 키캐가 아닌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말보다 마음에 더 귀를 기울이려고 노력한다. 그의 하늘색 눈동자는 늘 호기심 가득차 있었고, 눈가와 입가에는 웃음으로 잔주름이 선명했지만 탄력있는 구리빛 피부라 누가봐도 신비롭고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반면, 키캐는 핑크빛이 도는 화사한 피부에 몽환적인 연한 갈색 눈동자가 머리색과 꼭 닮아있었고 이런 신비롭고 몽환적인 이미지 덕분에 키캐는 스페인에서 모델로도 활동했었다.


 그 말을 듣고도 미안함에 서성이니 크리스티앙이 테이블 의자를 빼주었고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자리에 앉았다.


"카페 콘 레체? (카페라테?) 후고 데 나랑하?(오렌지주스?)"

"카페콘레체 뽀르빠보르."


"다 됐다."


 크리스티앙은 커피를, 키캐는 접시에 계란프라이, 베이컨, 빵을 예쁘게 플레이팅 해서 건네주었다.


"그라시아스. 부엔 프로베초(맛있게 드세요.)"

"콘 구스또."

"콘구스또가 무슨 말이야? 그라시아스 하면 '데 나다' 하는 거 아냐?"


 크리스티앙은 그 말을 듣고 열두 개의 치아를 가지런하게 들어내며 웃을 뿐이었다. 나쁜 의미가 아닌 건 확실한데 뜻을 알려주지 않으니 궁금해서 미칠 노릇이었다.


"오늘 우리는 페레헤까지 갈 거야." 키캐가 오늘의 목적지에 대해 말한다. 그의 설명을 듣고 거북이 등껍질 같은 무거운 배낭을 메고 새벽길을 나서려는데 크리스티앙이 파란색 봉지 하나를 내 손에 쥐어준다.


"아란, 이건 샌드위치. 싸는 김에 같이 쌌어."

"무차스 그라시아스."

"콘 구스토."

"대체 무슨 뜻이야?"

"오히려 제 기쁨입니다."


 파란 봉지 안에는 두 사람의 마음이 가득 담긴 묵직한 샌드위치가 들려있었다. 

'Con Gusto(오히려 내 기쁨)' 책에서도 알려주지 않는 표현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배우고 길을 나선다. 가방은 무겁지만 어쩐지 마음이 날아갈 듯이 가볍다. 왼쪽은 크리스티앙, 오른쪽은 키캐. 게이커플과 한국 여자. 우리는 무슨 조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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