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앙은 말할 것도 없고 키캐도 매직크림 덕분인지 컨디션이 좋아 보인다. 그늘 한점 없는 땡볕을 한 시간 정도 걸어야 했지만 두 사람 덕분에 힘들지 않게 트라바델로에 도착했다.
폰세바돈보다 크지만 인구가 400명이 되지 않는 작은 마을 트라바델로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순례자들이 지나야 하는 스페인 작은 마을이다. 작은 슈퍼와 카페 등 편의시설도 있고 순례자를 위한 알베르게도 있어 우리는 여기서 머물기로 했다. 알베르게에서는 순례자들을 위한 작은 펍을 함께 운영하고 있었고 마당에는 작은 미끄럼틀과 그네가 있었다.
뜨거운 태양아래 속도를 내어 걸었더니 발등이 다시 봉긋하게 솟아올랐다. 찬물에 찰박찰박 발을 담그고 일기를 쓰고 있는데 크리스티앙과 키캐가 두리번거리더니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다가온다. 두 사람의 손에는 찬물이 가득 담긴 양동이가 들려있었다.
"아란~ 여기 있었네?!"
"응! 발등이 조금 부어서 발 담그고 있었어. 빨래는 다 했어?"
"그럼, 오늘 날이 좋아서 금방 마를 것 같아. 그치?"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듯 두 사람 덕분에 내 마음속 그늘이 걷히고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키캐는 책을 읽고, 크리스티앙과 나는 일기를 썼다. 우리는 한 동안 말이 없었다. 이렇게 따뜻하고 편안한 침묵이 또 있을까? 각자의 순간에 집중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 먼저 말문을 열었다.
"오늘 샌드위치 정말 맛있게 잘 먹었어. 저녁은 내가 만들어주고 싶은데.."
"정말? 물론이지!"
"나 슈퍼 다녀올게. 혹시 뭐 필요한 거 있어? 사다 줄게."
키캐가 크리스티앙에게 통역을 해주었고 두 사람은 스페인어로 대화를 했다.
"같이가. 우리도 갈래." 크리스티앙이 말했다.
"오늘 저녁은 네가 차려주고, 내일 아침이랑 점심은 우리가 책임질게. 어때?"
호의에 대한 빚을 갚으려고 제안했지만 이자가 붙어나 더 큰 빚을 진 기분으로 함께 슈퍼에 갔다. 작은 슈퍼 가판대에는 오렌지, 사과, 딸기 등 과일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어 오렌지다!!"
두 사람은 내 목소리를 듣고 발걸음을 멈추었고 그들이 뒤를 돌아봤을 때 나는 레이레에게서 배운 완벽한 스페인 문장을 웅변대회에 나간 소녀처럼 그들에게 말했다.
"메 구스탄 라스 나랑하스.(나는 오렌지를 좋아합니다.)"
"하하하하하.. 그건 또 어디서 배웠어?"
오렌지로 유명한 발렌시아 출신 두 사람은 웃음을 터트렸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흩어져서 장을 보았고 베이컨, 계란, 쌀과 야채를 사서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오늘 저녁메뉴는 볶음밥과 계란찜. 밥을 올리고 당근과 감자를 손질하고 있는데 크리스티앙이 옆에 슬쩍 와서 묻는다.
"뭐 도와줄까?"
"노 프로블레마(문제없어)."
"나도 한국요리 같이 하고 싶어서 그래. 제발.. 같이하게 해 줘."
하늘색 눈동자에 또 기분 좋은 항복을 하고 말았다. 간절한 크리스티앙에게 야채 손질 하는 것을 넘기고 나는 계란찜을 중탕시켜 두었다. 밥이 완성되고 그가 손질한 야채와 베이컨을 밥과 함께 휘휘 볶아주었다. 특별할 건 없지만 그래도 두 사람이 한국 음식의 맛을 조금이나마 맛있게 먹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득 담았다. 계란찜과 야채와 베이컨을 넣은 볶음밥. 그리고 히라다상이 준 김도 잘라 세팅을 했다.
"부엔 프로베쵸."
"잘 먹겠습니다."
한국 음식을 처음 접하는 두 사람. 그들의 입맛에 맞을지 걱정이 되었다. 계란찜을 먼저 한 술 뜨는 키캐와 볶음밥을 크게 한 숟가락 입안으로 넣는 크리스티앙을 태연한 척 바라보았지만 심장은 쿵쾅쿵쾅 뛰었다.
"어때? 맛있어?"
"음.. 부에노!"
두 사람은 맛을 음미하며 서로를 바라보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볶음밥과 계란찜이 입맛에 맞는다니 천만다행이었다. 자신감이 붙어 접시에 있는 김 한 장을 들고 설명했다.
"이건 김인데 여기에 볶음밥 싸서 먹어도 맛있을 거야."
의심할 법도 한데 두 사람 똑같이 김을 한 장 손바닥에 올린 후 볶음밥을 넣고 돌돌 싸서 맛있게 먹는다. 나도 나를 믿지 못하는데 키캐와 크리스티앙은 나를 믿지 못하는 내 모습도 한 치의 의심 없이 믿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