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앙을 따라 메뉴판의 글자를 하나하나 읽자 그의 하늘색 눈빛은 더욱 커지며 반짝이기 시작했고키캐는 클라라(*맥주+환타레몬)를 마시며 미소를 지었다. 메뉴판에 있는 모든 메뉴를 다 따라 읽었고 크리스티앙이 말했다.
"자, 이제 됐지? 오늘은 네가 주문하는 거야."
"내가?"
크리스티앙이 장난스레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시험을 앞두고 벼락치기하는 고등학생처럼 메뉴판을 다시 훑어보며 심호흡을 한번 했다. 직원이 우리 테이블로 다가오자 나는 서툰 스페인어로 키캐의 생선요리와 크리스티앙과 나의 돼지고기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비록 유창하지는 않았지만 한마디 한마디 힘주어 말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의 메뉴를 적어 내려갔다.
직원이 다시 한번 메뉴를 확인하고 돌아서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크리스티앙은 나를 바라보며 한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클레버. 하이파이브."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하이파이브를 외쳤다. 우리의 두 손뼉이 마주치자 경쾌한 소리가 퍼졌고 웃음이 터졌다. 맥주를 한잔 더 마시며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그때, 작은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우리 테이블로 살금살금 기어 왔다. 빵조각이라도 얻어먹으려는 듯 고양이는 눈을 깜빡이며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크리스티앙은 바구니에 있는 바게트 빵을 조금 떼어 고양이 앞에 내밀었다. 그는 고양이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 나에게 물었다.
"야옹~ 야옹~~ 아란, 반려묘나 반려견 키우고 있어?"
"아니, 내가 생각보다 좀 겁이 많아서 동물은 못 키워. 책임지는 것도 쉽지 않고."
"그렇구나. 나도 원래 그랬었는데 4년 전쯤이었나? 마트에 가서 장을 보고 짐을 차에 싣고 있는데 갑자기 고양이 한 마리가 내 차로 쏙~ 들어온 거야. 나가라고 해도 말을 들어야 말이지. 마치 내 차가 고양이의 보금자리처럼 굉장히 편안해 보이더라고. 이것도 인연인 것 같아 결국 집으로 데려오게 됐어. 이름은 루나야. 우리가 월요일에 만났거든."
크리스티앙과 키캐 작은 우연조차도 소중한 인연으로 만드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반려묘 루나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가 함께 걷자고 했던 날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놀라 당황하여 거절했지만, 나도 모르게 그의 제안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며칠 후 내가 먼저 함께 걷자고 했고 우리 셋은 친구가 되었다.
'그때 만약 내가 용기를 내지 않았더라면 나의 카미노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생각하던 찰나 마침내 우리가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크리스티앙이 스테이크를 먼저 한점 먹었고, 나도 갓 나온 따끈따끈한 돼지고기 스테이크를 한 입 베어 물려는 순간, 나보다 먼저 스테이크를 한 점 맛본 크리스티앙이 먹지 말라는 손짓을 하더니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졌다. 그는 포크를 내려놓고 직원을 불렀다. 음식에 거의 손을 대지 않은 채 직원과 한참 언성을 높이며 실랑이를 벌였다. 나는 불안한 기운과 함께무언가 큰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화가 났어?"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그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애써 미소를 지었지만, 그의 시선은 나를 스쳐 직원에게 고정되었다.
"아란, 배가 고프겠지만 이 스테이크는 안 먹는 게 좋을 것 같아."
"정말? 왜? 나는 맛있는 것 같은데?"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에게 물었다.
"맛의 문제가 아니라, 고기가 정말 이상해."
몇 분 후 주방에서 요리하던 직원까지 나와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크리스티앙과 키캐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급기야 식당에 들어오려던 다른 손님들이 들어오려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다른 식당으로 발길을 옮겨야 했다.
크리스티앙은 늘 내 눈높이에서 생각하고 말해주는 천사 같은 친구였다. 그의 환한 미소는 늘 나를 편안하고 그와의 대화는 항상 즐거웠다. 그의 그런 모습만 보아서 그런지 불만 서린 그의 얼굴은 굉장히 낯설고 차가웠다. 루나 이야기할 때까지는 청명한 하늘처럼 맑았던 그의 표정이 돼지고기 한입 맛본 순간 갑자기 까만 먹구름이 가득 드리워졌다.
"아란, 이건 음식이 아니야. 일어나! 가자." 크리스티앙과 키캐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어떤 문제가 있는지 영문도 알지 못한 채로 그들을 따라나섰고 우리는 알베르게로 향했다. 도착해서 마당에 앉아 일기를 쓰고 있는데 키캐가 나에게 다가와 다정한 눈빛으로 물었다.
"아란, 많이 놀랐지?"
"응, 조금... 많이? 모든 일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는 거잖아. 아까 식당에서 한 행동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고마워. 돼지고기가 덜익어서 익혀달라고 했지만 오히려 직원이 적반하장으로 나오더라고. 돼지고기 질도 안좋고 생선도 덜익고 비린내가 엄청 심했어. 그 직원이 사과를 했으면 됐을텐데 사과는 커녕 우리를 이상한 사람으로 몰더라니까."
"그랬구나.. 그래서 먹지 말라고 한거였구나. 고마워. 키캐. "
크리스티앙은 저녁 장을 보러 슈퍼마켓으로, 키캐는 발바닥에 잡힌 물집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으로 향했다. 나는 마당에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를 등지고 앉아 하늘을 바라보며 하루 일과를 마무리했다. 멍하니 앉아 며칠 남지 않은 산티아고 여정, 아일랜드, 취업.. 불안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저 멀리서 양손 가득 하얀색 봉지를 들고 내쪽을 향해 걸어오는 크리스티앙이 보였다.
"아란, 배고프지? 조금만 기다려. 밥 금방 해줄게."
그는 주방으로 들어가더니 밥 위에 토마토소스, 계란프라이를 얹은 스페인식 볶음밥을 만들어주었다.
"맛있다."
"아까는 놀랐지? 미안해.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됐네." 크리스티앙은 진심 어린 사과를 했다. 작은 생명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의 태도에는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전후 사정을 설명하고 사과를 하는 그의 모습이 덧없이 멋져 보였다.
우리는 저녁을 먹고 마당에서 노을을 감상하며 시원한 맥주를 한잔씩 마셨다. 두 친구의 인간적이고도 새로운 모습을 본 순간 조금 더 가까워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맥주가 비워질수록 노을의 색깔도 점점 짙어졌고 나는 우리의 우정도 이 노을 풍경처럼 천천히 그리고 아름답게 물들기를 간절히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