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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곰 Nov 02. 2024

사리아

인생에는 예약이 없다

 아침은 뜻하지 않은 아주 작은 기적으로 시작되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일어났는데 세수를 하고 나오니 식탁에는 한 상 가득 정갈하게 차려진 아침이 놓여 있었다. 바게트빵, 하몽, 콜라카오, 치즈, 오렌지주스. 두 남자가 손수 차려놓은 식탁 위에는 정성 어린 손길이 묻어나 있었다. 크리스티앙은 전날 점심 식사를 망친 것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식탁을 가득 채워놓았다. 곳곳에서 그의 작은 배려가 느껴졌다.


"세상에... 이게 다 뭐야?" 나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디스 이즈 포 유" 그가 하늘색 눈동자를 천천히 깜빡이며 말했다. 깊고 짙은 속눈썹이 그의 진심을 전하고 있었다.


"오늘은 어제보다 오래 걸어야 하니까 이 정도는 먹어줘야지." 키캐는 환하게 웃으며 크리스티앙의 말을 거들었고 크리스티앙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엔 프로베쵸.(맛있게 드세요.)"


 이른 새벽, 두 사람이 정성껏 차려준 아침을 먹고 우리는 길을 나섰다. 어느덧 갈리시아지방에 들어서며 산티아고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구름이 산 중턱에 걸쳐 있고 그 뒤로 해가 고운 자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장면은 마치 영화의 엔딩 크레딧처럼 눈앞에 황홀하게 펼쳐졌다. 나를 에워싼 구름은 요정들이 살고 있을 법한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세계로 나를 이끌며 당장이라도 나무 뒤에 숨어있는 요정이 인사를 건넬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구름이 내 발밑에서 부드럽게 흘러가고 멀리 떠오르는 태양의 빛이 나를 감싸는 순간, 나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그 광경에 빠져들었다.


"무슨 일이야? 어디 아픈 거야?" 키캐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그건 아니야.. 그저 자연의 경이로움에 감탄 중이야. 태양은 찬란한 빛으로 세상을 밝히기 위해 떠오르고, 구름은 그 아래 우리를 포근하게 감싸 안고 있고. 이런 과분한 선물을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어."


 키캐는 크리스티앙에게 통역을 해주었다. 그 말을 들은 크리스티앙과 키캐 그리고 나는 잠시 함께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주황색으로 물들어가고, 태양의 따뜻한 빛이 우리를 비추었다. 크리스티앙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아란, 당연하지. 너는 충분히 그럴 자격 있어."


"그럼, 산티아고를 걷는 사람들을 위해 자연이 준비한 거라고." 키캐가 거들었다.


 우리는 해가 떠오르는 광경을 말없이 감상한 후 길을 나섰고 사리아에 도착했다. 갈리시아 지방에 위치한 이 작은 도시는 많은 순례자들이 산티아고 도보순례를 시작하는 출발점으로 알려져 있다. 사리아에서 산티아고까지 약 100km를 걸으면 순례자 증명서인 '콤포스텔라'를 받을 자격이 주어지기에 이곳에서 여정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순례자를 가장한 여행객의 모습으로 길을 나섰다. 가방 하나 없이 오직 물 한 병과 지팡이만 들고 100km의 길을 걸어 증명서만 받으려는 사람들이었다. 스페인에서는 이 증명서가 있으면 직장을 구하기가 훨씬 수월하다고 했다. 사리아는 순례자와 순례자를 가장한 여행객들로 북적이기 때문에 알베르게 하나 찾는 것도 하늘의 별따기일 거라며 키캐는 고개를 저었다.


 사리아에 도착하고 크리스티앙과 키캐는 지인을 통하여 알베르게를 알아보았지만 어디를 가든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다. 만석이었다. 우리는 성당 앞 알베르게에 들어섰지만 역시나 또 한 번 거절을 당하고 말았다. 이 한 몸 뉘일 곳을 찾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인지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지칠 대로 지친 우리는 성당 앞에 있는 벤치에 셋이 쪼르르 앉아 있었다. 그때 키캐가 입을 열었다.   


 "아란, 너는 잠시 여기서 기다려."


 크리스티앙과 키캐는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알베르게를 찾아다녔다. 나는 잠시 성당 앞에서 기다렸다. 30분쯤 흘렀을까? 키캐와 크리스티앙이 저 멀리서 나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란 컴컴!!"

"찾았어?" 내가 물었다.

"응, 여기도 사실 만석인데 알베르게 사장님이 매트리스 3개를 깔아준대. 지금은 사람들이 다녀서 안되고 저녁에 깔아준다 하셨어."


 그 말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들과 함께 알베르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장님께서는 우리가 도착하기 전 매트리스 세 개를 정성스럽게 세팅해 주셨고 칸막이까지 따로 설치해 주신 덕분에 우리의 작은 공간이 더욱 아늑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짐을 놓고 늦은 점심을 먹으러 갔다. 크리스티앙과 나는 맥주를, 맥주보다 와인을 선호하는 키캐는 클라라를 주문했다.


"아란, 나 궁금한 거 있어." 크리스티앙의 눈빛은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디메(Dime)"

"언제부터 우리가 게이라는 걸 언제부터 알았어?"

"아.. 음.. 처음에 친구인 줄 알았는데 두 사람 손가락에 있는 커플링이 보이더라고. 그때 알았어."

"그렇구나. 게이인걸 알았을 때 느낌이 어땠어?"

"내가 골웨이에서 어학연수 하고 있잖아. 근데 옆방에 사는 데이비드도 게이고 학교 선생님도 게이라 뭐 아무렇지 않아. 게이든 게이가 아니든 그냥 너희들 있는 그대로 좋아."  


 크리스티앙은 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감동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서로의 잔을 부딪히며 사리아 알베르게를 찾은 기쁨을 만끽했다. 평소와 다르게 맥주 한 모금을 마시고 내려놓으니 그가 물었다.


"아란, 무슨 일이야?"

"요즘 숨도 차고, 살도 찌고, 오르막길에 헥헥거리기만 해. 아마 술 때문이 아닐까?"

"노 프로블레마. 살룻" 그의 미소는 조금 위안이 되었다.

"그렇지?"


 크리스티앙의 유혹에 넘어가 맥주와 갈리시아에서 유명한 문어요리를 주문했다.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 후, 자리로 돌아오니 키캐가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아란, 너 입에 뭐가 묻었어. 자 여기 냅킨."


 입을 닦으려는 순간 그가 건네준 냅킨에 눈길이 갔다. 그 위에는 귀여운 오리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고, 'Oh! Be go pa(배고파)'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며칠 전 내가 알려준 한국어를 기억하는 걸까? 냅킨을 바라보며 한참을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하하.. 너무 귀여운 거 아냐? 그런데 그거 알아?  '배고파'라고 할 때는 배를 움켜잡고 말해야 하고 '배불러'라고 할 때는 배를 쑥 내밀고 치면서 말해야 해."


 내가 먼저 시범을 보였고 곧잘 따라 하는 두 사람. 그렇게 우리는 점심 만찬을 즐기고 우리는 알베르게로 돌아갔다. 노곤노곤해서 계속 하품만 나왔지만 아직 매트리스를 깔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라 우리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하암~~~"  


"아직 침대주인이 안 왔는데 여기서 잠깐 눈 좀 붙일래요?"

"그래, 아란, 우리 여기서 눈 좀 붙이자."


 알베르게 사장님은 피곤에 지친 내가 꾸벅꾸벅 조는 내 모습을 보며 미소 짓고 말씀하셨다. 사장님의 배려에는 고마운 마음이, 침대 주인에게 미안함이 스쳤다. 그렇게 우리는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다. 달콤한 낮잠에서 깨어났을 때 두 사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나 혼자만 덩그러니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조심스럽게 침낭을 챙겨 일어나는데 종이 한 장이 침대 밑으로 툭 떨어졌다. 종이를 펼쳐보니 짧은 편지가 눈에 들어왔다.


아란, 일어났는데 우리가 옆에 없어서 많이 놀랐지?

잠깐 병원 다녀와야 할 것 같아 병원에 다녀올게.

이따 만나.

-크리스티앙&키캐-


 침낭을 정리하고 나왔는데 크리스티앙과 키캐가 들어왔다. 키캐는 발가락에 물집이 많이 잡혔는지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다.


"키캐 괜찮아?"

"그럼, 물론이지. 그런데 한번 자면 누가 업어가도 모르는구나. 우리가 너를 몇 번이나 불렀는데 코까지 골면서 깊이 잠들어 있더라고."  


 두 사람이 돌아온 후 우리는 함께 사리아 밤공기를 맞으며 산책을 했다. 어둠이 짙게 깔린 거리 한쪽에 커다란 대형버스가 멈춰 섰고 몇몇 사람들이 손바닥만 한 배낭을 메고 버스에서 내렸다. 그들은 우리가 있는 바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맥주를 주문했다.


"크리스티앙, 키캐. 진정한 순례는 뭘까? 내가 이런 말 할 자격은 없지만 오늘 길 위에서 본 순례자들을 보면서 이 길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나도 잠시 헷갈리더라고. 아무런 짐도 없이 오롯이 이 길을 완주하기만 하면 되는 걸까? 배낭의 무게는 인생의 무게와도 같은데 말이야. 배낭도 없이 걷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싶어."


내 말을 듣고 크리스탕은 사색에 빠졌고 키캐는 나의 말을 거들었다.


"아란, 네 말이 맞아. 여기서 시작한 순례자들은 대부분 증명서를 받기 위해 걷는다고 해. 나도 처음에는 완주 증명서를 받으려고 걸었지만 며칠 지나고 보니 걷는 것 자체가 의미 있더라고. 완주증명서보다 이 순간, 너와 함께 하는 이 길이 참 소중해."


그때 크리스티앙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나도 두 사람 말에 동의해. 순례는 신성한 건데 요즘은 너무 상업적으로 변하는 것 같아서 아쉽더라고. 알베르게 찾는 것도 갈수록 힘들어지고.."


"맞아. 인생에는 예약이 없잖아. 자리가 있으면 쉬고, 없으면 조금 더 걷거나 덜 걷거나 하는 게 진짜 순례 같은데.." 내가 덧붙였다.


 내가 말을 마치자 크리스티앙은 키캐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내 눈치를 보더니 마침내 키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란, 우리도 네 생각에 동의해. 그런데 현실적으로 그 순례자를 가장한 여행객들 때문에 우리가 점점 더 힘들어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생각하던 찰나 키캐가 덧붙여 말했다.


"사실, 너한테 말은 안 했지만 아까 병원 갔다 오면서 내일 우리가 묵을 알베르게를 미리예약했어."


정말 고마웠지만  신념과는 어긋난 느낌이 들었다.


 우리들만의 작은 침실. 불이 꺼지고 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많은 순례자들에게 진정한 자신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는 이 숭고한 순례길이 몇몇 이들에게게는 그저 관광코스나 단순한 여행에 불과한 듯 보였다. 그 의미가 점차 퇴색해 가는 것 같아 마음 한켠이 씁쓸해졌다. 그렇게 나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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