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까지만 해도 지난 1년 이상 계속된 미중 무역전쟁 협상의 타결이 임박했나 싶더니 상황이 다시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이 전쟁의 한복판에서 보잉 항공기만큼이나 중국이 미국에 대항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 중 하나는 대두(soybean)다.
전 세계에서 교역되는 대두의 반 이상을 수입하고 있는 중국은, 브라질과 더불어 세계 대두 수출시장을 양분하는 미국산 대두에 막대한 관세를 부과하여 미국 내 트럼프 대통령의 핵심 지지층을 압박하고 있다. 그 사이 세계 농산물 무역의 큰 줄기가 바뀌면서 중국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브라질의 대두 농가들과, 똥값이 된 미산 대두를 저렴하게 주워갈 수 있었던 유럽의 크러셔(crusher)들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올해도 벌써 6월이 되었으니 미국의 대두 농가들이 마지막으로 씨앗을 뿌릴 수 있는 기한이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트럼프 대통령의 트위터를 뚫어져라 들여다 보아도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트럼프 대통령의 충성스러운 지지층이었던 미 중부의 농가들이 첫해에는 기꺼이 국익(MAGA)을 위해 감수했다 하지만, 과연 이 상황이 두 번 세 번 계속되어도 버틸 수 있을까? 언젠가는 협상이 타결될 것이라는 전망과,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하여 낙관할 수 없다는 의견이 엇갈리는 가운데 자연의 시계는 째깍째깍 흐르고 있다.
그럼 대두가 왜 이리 중요한가? 대두는 사람이 먹는 두유, 두부, 식용유, 간장 등의 원료가 되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고기와 계란을 제공하는 가축에게도 몹시 중요하다. (종자부터 찌꺼기까지 버릴 것이 없는 콩) 오늘날의 산업화된 가축 사육방식에서 사람이 남긴 음식물 쓰레기를 먹여 동물들을 키워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가격적으로나, 위생적으로나, 영양적으로 보았을 때 곡물을 주원료로 하여 체계적으로 제조되는 배합사료 없이는 지금처럼 싼 가격에 대량으로 축산, 낙농품을 생산해내기 어려울 것이다. 이때 사료곡물의 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옥수수는 에너지 주공급원, 대두에서 기름을 짜내고 남은 대두박은 동물성 단백질을 대체하는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이 된다. 그 외에 기타 곡물, 유지, 첨가제, 육골/어분 등이 가격과 영양 배합에 따라 들어갈 수도 있지만 오늘날 생산되는 배합사료의 가장 중요한 두 원료는 옥수수와 대두박이다.
이른바 crusher라고 부르는 대두 가공업체들은 값싼 수입산 또는 자국산 대두를 분쇄(crush), 압착하여 사람이 먹는 기름을 짜내고 남는 대두박도 사료 원료로 판매한다. 이렇게 대두를 가공하여 기름과 대두박(대두피까지)을 판매하여 얻는 이익을 크러싱마진(crushing margin)이라고 부른다. 아르헨티나 같은 나라에서는 값싼 자국산 대두를 분쇄하여 가공물인 대두유와 대두박을 주로 수출하고, 브라질 같은 나라에서는 아르헨티나보다 대두 생산량이 많음에도 가공된 대두유와 대두박보다 원료인 대두의 수출비중이 더 크다. 중국도 작지 않은 대두 생산량을 자랑하나(세계 4위), 절대적으로 큰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값싼 미국과 브라질산 대두를 수입하여 자국 내에서 가공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백설과 해표 식용유로 유명한 제일제당과 사조해표가 대표적인 대두 가공업체라고 할 수 있다.
안 그래도 전 세계 최대 14억 인구가 식용유, 두부, 장의 형태로 직접 먹어치우는 대두의 양도 만만치 않은데, 이 14억 인구가 사랑하는 돼지고기로 곧 식탁에 오를 4~5억 두의 돼지가 먹어치울 대두박을 생각해보자. 중국에게 대두는 이 무역전쟁에서 너무나 매력적인 카드가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잠깐. 어째서 식량의 수입국이 수출국에 대해서 '갑'이 되는 것일까? '식량전쟁'은 식량을 많이 생산(수출)하는 나라가 수출을 끊어서 상대 수입국을 위협하고, 굴복시키고, 굶겨 죽이기까지 하는 것 아니었던가? 자유시장이 작동하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다른 대안이 있는 중국의 수요자와, 1년 동안 고생해서 생산한 대두를 팔아야 먹고살 수 있는 미국의 공급자 간에 관계를 생각한다면, 무역전쟁으로 양국을 잇던 대두의 물줄기가 끊겼을 때 당장 더 고통받는 것은 누구일까?
사실 지금은 중국이 미국에서 대두를 수입해다 쓰지만 미국에서 대두가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9세기의 일에 불과하다. 대두의 원산지는 중국 동북부 만주 지역과 한반도 부근이고 이미 5,000년 전부터 재배가 시작되었다. 동북아시아에서는 비교적 재배 시작이 늦었던 일본에서도 2,000년 전 이미 한반도를 거쳐 전파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니, 오늘날 세계를 주름잡는 미국과 브라질 등의 재배 역사는 비할바가 못된다.
대두의 원산지로 추정되며 지금도 대두가 많이 나는 중국 동북부 지역은 특히 대두와 인연이 깊다. 미중간 무역전쟁이 한창 불꽃을 튀기던 작년 가을, 필자가 존경하는 위공 정수일 선생님을 오랜만에 찾아뵙고 인사를 드릴 때 대두 이야기가 나왔다. 선생께서는 몇 년 전 옥수수와 대두가 많이 나는 남미 답사를 마치시기도 하였고, 제자가 하고 있는 업에 대한 워낙 박학하신 분의 따뜻한 관심의 표시 정도라고 처음에는 생각했는데 말씀의 깊이가 갈수록 깜짝 놀랄 정도였다. 일반인은 깻묵 정도로 알고 있는 '대두박'이라는 용어도 아주 정확하게 알고 계셨고 대두의 가공 과정, 대두의 주산지 등에 대해 놀랄 정도로 상세히 알고 계셨다. 어찌 이렇게 자세히 알고 계신지 듣고 나니 더욱 감탄하게 된 사연은 이렇다.
1934년 길림성 연길에서 태어나신 선생께서 유소년기에 만주는 중일 전쟁, 태평양 전쟁의 직격탄을 맞고 있었다. 드넓은 만주 땅에는 당시에도 대두가 많이 자라고 있었고 대두에서 기름을 짜내는 오늘날의 "crusher"들도 많았다고 한다. 계속되는 전쟁의 여파로 식량(아마도 쌀)이 부족해지자 일제는 대두에서 기름을 짜내고 난 콩깻묵을 식량으로 민간에 배급하였다. 선생께서는 이때 많이 먹었던 고소한 향이 나는 대두박의 맛을 그 이름과 함께 아직도 기억하고 계셨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만주에서 들어온 콩깻묵을 먹었다는 이야기는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오늘날 사람이 대두박을 먹는 일은 거의 없지만 사람보다 무게가 훨씬 많이 나가는 짐승들도 고기 한점 먹지 않고 무럭무럭 자라는 것을 보면, 어려운 전시에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훌륭한 영양공급원이 되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만 마음이 짠하다.
말씀을 들으며 기억을 더듬어보니 나 자신도 몇 년 전에 비슷한 걸 먹은 적이 있었다. 서울에서 북한의 역사와 사회를 연구하는 두 영국인, 러시아인 친구와 인천에서 점심 약속을 먹기로 하였는데, 러시아인 친구가 본인이 아는 맛있는 북한 식당이 있다며 우리를 이끌고 갔다. 연수구 어느 아파트 단지 내 상가에 뜬금없이 위치한 곳이었는데, 그곳에서 "인조고기"라는 것을 처음 맛보았다. 유부나 어묵과도 같이 생긴 노란색 피에 매운 고추기름을 발라 밥과 함께 먹는 음식이었다. 그 노란색 피가 바로 콩깻묵으로 만든 것인데 씹는 질감이나 영양이 고기와도 같아 북한 주민들이 고기 대신 즐겨먹는다고 러시아 친구가 설명해주었다. 제법 중독성이 있어 한참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다.
만주에서의 전쟁이 끝났듯 무역전쟁도 곧 끝이 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