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호텔에 살게 해 준 고마운 아이비
사실 라니 이모가 우리와 처음 만난 가사도우미는 아니었다.
6년 반전 처음 싱가포르에 넘어갔을 때 나는 아직 총각이었다. 총각 주제에 집값 비싼 싱가포르에서 방 두 개 딸린 콘도에 살게 된 나는 일이 바빠 집안일을 할 겨를이 많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부터 집에서 나가서 산 자취경력도 길었지만 집을 깔끔하게 유지하는 건 언제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싱가포르에 건너간 지 한두 달이 지났을 무렵, 일로 만난 변호사 친구들과 저녁을 먹다가 문득 헬퍼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중 한 명이 말하길 일주일에 한 번씩 집에 와 네 시간 정도 청소와 빨래를 도와주는 그녀들 덕분에 너무나 행복하다는 것이었다. 한번 왔다 가면 마치 오성급 호텔처럼 집안이 정리된다는 말에 나도 호기심이 생겼다. 결국 연락처를 하나 건네받았다.
그렇게 처음 만난 아이비는 자칫 홀아비 냄새나는 총각의 자취방으로 전락할 수 있었던 우리 집을 정말 호텔처럼 만들어주었다. 아이비가 한번 왔다 가면 타일로 된 거실 바닥에서는 광이 나고, 일주일 동안 입었던 셔츠는 세탁소에 맡겼던 것처럼 반듯하게 다려져 옷걸이에 걸려있었으며, 퀸사이즈 침대는 어지간한 호텔 침대보다 예쁘게 정돈되어 있었고, 화장실 바닥은 청소 후에도 물기하나 없이 깨끗하게 말려져 은은한 향기가 돌았다. 내가 출장을 가는 날이면 캐리어에 챙기기 쉽도록 셔츠와 양말 등을 마치 새 옷처럼 네모나게 각지게 접어두는 센스도 있었다.
남자 혼자 사는 집에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불편하지 않도록 나도 최대한 신경을 썼다. 따뜻한 나라의 집구조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겠으나, 항상 현관문은 살짝 열어두고 환기를 위해서도 창문과 베란다 문을 활짝 열어 두었다. 아이비와 점점 친해지면서 이곳에 있는 그녀의 친구들, 필리핀에 있는 가족들에 대해서도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다. 자그마하고 야리야리한 체구였지만 언제나 당당하고 멋지게 자신을 꾸밀 줄 아는 아이비의 미래 계획을 듣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결혼을 하고 아내가 싱가포르에 오고 나서도 아이비는 정기적으로 우리의 집안일을 도와주었다. 아내에게 필리핀 요리인 아도보와 판싯 을 만드는 방법도 가르쳐주었다. 열심히 배운 아내 덕분에 두고두고 맛있는 요리를 생각날 때면 먹고 있다. 아내도 뭔가 한국요리를 가르쳐 준 것 같은데 아이비가 제대로 배웠는지는 모르겠다. 어느 날 하루는 에어컨에 들어간 도마뱀이 하도 속을 썩여 어떻게 할 수 없을까 아이비에게 상의를 했다. 잠깐 조용한가 싶더니 아이비는 페트병 속에 도마뱀을 생포해서 내게 보여주고 밖에 풀어주었다. 도대체 어떻게 잡았는지 물어봤더니 말레이시아에서 일할 때는 뱀에 물리기도 해보고 뱀도 잡아봤다는 얘기를 대수롭지 않게 하는 모습에, 참 생활력이 강하고 낙천적인 동남아시아 여성들에 대해 다시 한번 감탄했다.
가끔씩 청소를 다 마치고 야외 발코니에 앉아 담배를 피우던 아이비는 조용한 성격이었지만 자기주장이 명확했다. 우리에게 아이 계획이 생기고 나서, 혹시 우리와 함께 살며 아이를 돌봐줄 수 없겠냐는 나의 제안은 바로 깔끔하게 거절했다. 자신은 청소와 세탁은 좋아하지만 아이를 돌볼 자신은 없다는 이유였다.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고 그럼 좋은 사람을 추천해 줄 수 있겠느냐고 부탁했다. 어디를 가든 자신들만의 촘촘한 네트워크가 잘 발달한 필리핀 여성답게 바로 몇 사람을 내게 추천해 주었다.
내가 처음 싱가포르에 건너가서 일에만 집중하고 건강하게 쾌적한 삶을 살 수 있었던 데에는 아이비의 도움이 컸다. 나도 그녀에게 늘 감사한 만큼 특별한 날이면 두둑한 보너스를 챙겨주기 위해 노력했다. 아이비가 예쁘게 접어준 셔츠를 입고 다녀온 출장지에서 작은 선물을 사 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서로가 고맙고 덕분에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걸 아이비를 통해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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