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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희 Oct 11. 2019

하늘색 풍선

사적인 공간을 존중받고 싶은 그대에게


지친 얼굴이라도 금세 생기를 불어넣어줄 수 있는 틴트. 하루는 손가방에 늘 넣고 다니던 틴트가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전날 우리 집 막둥이가 빌려간 것이 생각났다. 


“엄마 애들이 자꾸 나보고 아파보인대요.”

“왜?”

“아니~, 입술이 너무 창백하다고 백혈병 환자 같다고 하잖아요.”

“그래? 너 틴트 바르고 싶구나?”

“아니 바르고 싶은 게 아니고 애들이 자꾸 아파 보인다고 하니까...”

“아~ 자꾸 그러니까 귀찮구나!”

“네!”     


그 마음을 모르는 게 아니어서 너무 빨갛지 않은 색으로 하나 사줬다. 요즘 아이들은 초등학생 때도 화장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이 트렌드처럼 되어버려서 우격다짐으로 안 된다고도 할 수가 없었다. 초등 6학년이 된 예비숙녀에게 피부 화장은 안된다고 하고 그 대신 틴트만 허락했던 것인데 말로만 필수품이었지 잃어버리기가 일쑤였다. 그날도 역시 자기 것을 잃어버렸다며 잠시 빌려간다더니 도로 넣어 놓질 않은 것이다.      


10대도 입술이 하얗게 보이면 아파 보인다고 신경을 쓰는데 40대 아줌마는 오죽하랴. 잠시 나갔던 길에 붉은 입술을 책임져 주는 효자종목이 없으니 난감했다. 예전에 어느 유명한 아나운서가 붉은 입술이 필요할 때는 입술을 질끈 깨물면 핏기가 돌아서 ‘이때다!’ 싶은 순간, 궁여지책으로 쓴다는 말이 생각났지만 난 이때다 싶은 순간은 아니었기에 입술 깨물기는 그만두기로 하고 집에 가면 딸에게 돌려받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40대의 생기 없는 입술이 문제가 아니라 깜박증이 문제였다. 아이를 보고 다른 얘기만 했지 틴트 돌려받는 생각은 꼭 외출했을 때만 생각이 나는 것이었다. 새로 하나 사려고 하면 거리에 깔린 곳이 화장품 가게인지라 어렵지 않게 하나 살 수 있을 테지만, 그 돈 몇 푼 쓰는 게 너무 아깝게 느껴져서 하루 이틀 버티고 있었다. 

그러기를 며칠, 하루는 지하철을 기다리려고 서 있는데 마침 플랫폼에 화장품점이 있길래 들어갔다. 저렴한 것으로 그냥 하나 사야겠다 싶어서였다. 

립스틱이 너무 많아서 뭐가 뭔지 구별이 되질 않아 어떤 것이 틴트냐고 직원에게 물어봤다. 직원은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고 살펴보았더니 영 내가 원하는 질감과 색상은 아니었다. 그냥 뒤돌아 나오려다가 매대의 다른 제품을 구경하는데 아까부터 지켜보던 직원의 눈길이 계속 느껴지는 것이다. 그것도 너무 가까이에서... 매장 안에 다른 손님은 없이 나만 있었던 까닭일까? 틴트 색깔 살필 때부터 시작된 시선이 몇 분째 한순간도 흔들림 없이 나를 향해 있었다. 옆에 바짝 붙어있는 직원의 응대가 너무 부담스러웠다. 틴트를 사려고 들어갔으나 빈손을 나오면 안 될 압박감을 느꼈다. 그냥 나와도 무방하겠지만 그런 시선을 느낀 채로 뒤통수를 보이며 빈손으로 나올 만큼 나는 당당하거나 뻔뻔하지 못하다. 다른 것을 보기 시작했다. 사려고 들면 필요 없는 물건이 어디 있으랴. 특히 여자들에게 화장품이란 것은 말이다. 마침 아이라이너가 필요했는데 저렴하고 마음에 드는 색이 있어서 골라 들었다. 그녀는 계속 내 옆을 지키고 있었다. 같은 매대에 다른 품목이 있어서 이것도 있으면 쓰겠다 싶어 또 하나 골랐다. 

계산대로 자리를 옮겼다. 

“아까 보시던 틴트가 발색도 좋고 성분도 좋은데요.”

“아뇨. 이것만 할게요.”

제법 단호했다. 이런 걸 요즘 아이들 말로 ‘단호박’이라고 하나보다. 


하지만 저렴이 제품 두 개를 주머니에 넣고 매장을 나온 나는 영 마음이 찜찜했다. 왜냐하면 내가 필요했던 건 아이라이너가 아니라! 틴트였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바보 같은가 말이다. 남자들이 알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일 것이다. 바지를 사러 가서 바지는 안 사고 셔츠를 사 오는 남자를 본 적이 있는가? (물론 어딘가엔 있겠지만) 오랜 수렵활동이 남자들에게 남겨준 본능은 목표물을 향해 돌진하는 것이고, 반대로 채집활동이 여자들에게 남겨준 본능은 주변을 살피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우리는 치마를 사러 갔다가 블라우스를 사서 들고 오는 여자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가 있고, 나 역시 대표주자로 늘 선두에 서있는 몹쓸 쇼핑 습관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런 충동구매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또 후회만 남기게 되는지 알기에 나이 들면서 그러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쓰는 중이었다. 

그런 내가 또 바보 쇼핑을 했으니, 두 종목 다 해서 만원밖에 안 하는 제품을 사고도 영 개운치가 않은 거였다. 내손에 붉은 입술을 책임질 틴트가 들려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없었으면 나왔어야 했다. 원하던 게 아니었으면 포기해야 했다. 


왜? 왜 때문에?? 나는!!! 엉뚱한 것을 사 왔는가...

나는 내 곁에 바짝 붙어 서있던 직원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왜? 왜 때문에?? 그렇게 불편하게 나를 바라보았는가? 그녀가 뚫어져라 나를 쳐다만 보고 있지 않았어도, 나는 유유히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매장을 나왔을 것이다. 마트 시식코너도 먹고 나면 사야 할 것 같아 부담스러워 지나치는 나란 사람. 오로지 나에게만 레이저를 쏘며 바라보는 점원을 등 뒤로 하고 빈손으로 나오기는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었기에, 나 스스로 선택한 구매였 괴로다. 하지만 괴로움을 피하고자 선택한 행동이 또 다른 괴로움이 되었다. 당당한 구매자가 되기 위해 선택한 나의 결정은 엉뚱한 구매를 한 어리석음이 되었고, 타인에게는 당당했을지 모르나 나 스스로에게는 끊임없이 자책을 하게 되는 비루한 기억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에는 ‘아니 왜?’ 하는 생각이 드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맞아 나도 좀 그럴 때가 있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성격의 차이일 테지만 상황을 떠나 내가 해놓고도 내가 맘에 안 드는 그런 상황은 한두 번쯤 있지 않겠는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도대체 왜 나는 그 순간 은근슬쩍 방향을 틀어 결국 꼭 필요한 것은 아닌 것에 눈길을 돌렸을까? 확실한 것 하나는 내가 여자 점원의 눈빛을 느끼고 있었고, 몹시 부담스러웠고, 그 순간 슬쩍 시선을 돌리고 싶은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그녀의 시선은 집요했고, 뭐라도 집어 들어야 할 것 같기에 그 사태(?)까지 벌어진 것이다. 한마디로 그녀는 말없이 압박 세일즈를 한 것이고, 나는 거기에 노예가 된 꼴이라고나 할까. 결론은 나에게 잘못이 있었다. 나는 고객으로서 편하게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불편한 순간 그것을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떡하면 내가 괴롭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렇다. 나는 정중하게 표현했어야 했다. 

“제가 혼자 천천히 보고 싶은데요,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얘기할게요.” 

“그렇게 가까이에서 바라보고 계시면 제가 좀 부담스러워서요.”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적당한 거리는 과연 얼마일까? 정신과 전문희 김혜남 저자는 그의 저서 ‘당신과 나 사이’에서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이 주장했던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바탕으로 한 또 다른 가상의 거리를 설명했다. 요약해보면 가족처럼 아주 사이의 친밀한 거리 20cm, 도움을 청하면 손을 뻗어 그 손을 잡아줄 친구의 거리 46cm, 회사에서와 같이 서로 존중해야 하는 사회적 거리는 120cm 이상의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해가 쏙 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다시 말해 사람 사이의 이런 적당한 거리를 지키지 않고 한마디로 ‘훅’ 들어오면 심리적으로 불편한 상황이 생기는 것이다.      


얼마 전 강의할 때의 일이다. 청중 한 분을 앞으로 모셔 짧은 스피치를 들어보려 했는데, 계단식 강의 장 뒤편에 앉아 있던 남자분께서 객석과 객석 사이 정중앙 통로를 가르며 무대 앞쪽으로 옷깃이 날리도록 달려오시는 게 아닌가! 100명 가까이 되던 객석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나는 이렇게 나를 향해 달려오는 남자는 처음이라 순간 심쿵했다며 너스레를 떨어 한번 더 웃게 해 드렸고, 옷깃 휘날리며 훅 들어오던 런닝맨 덕분에 강의장 분위기는 순간 확 좋아졌다. 그 덕분인지 그날의 강의 만족도는 상당히 높게 나왔다고 한다.     


라디오에서 들은 사연이다. 소개팅을 한 여자가 애프터를 신청하는 남자에게 생각할 시간을 좀 달라고 해놓고는 며칠 후 이런 문자를 남자에게 보냈다고 한다.

“오빠, 저랑 벚꽃놀이 가실래요?”

남자는 얼마나 심쿵했을까? 이런 이성의 훅치고 들어오는 연애방식은 분명 설렘이고 두근거림일 것이다.      

두 가지의 거리 좁히기 사례를 들어본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예기치 않은 상대의 접근은 당황스럽거나 설레거나 하는 낯선 감정이 생길 수 있고 그 상태로 너무 놀라 얼어붙을 수도, 또는 두려움에 뒷걸음을 치는 것으로 심리적 안전거리를 확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불편했던 시간으로 돌아가 보자. 나의 경우를 다시 보면 조금 더 안전하게 내가 나를 보호하고 싶었던 안전지대를 침해받았다고 보면 되겠다. 안전지대를 침해받으면 불안하고 낯선 느낌을 받는 것이 당연한데, 나는 그 느낌을 혼자만 속으로 생각하고 표현하지 못했던 것이다. 

세일즈를 잘하는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도와주려는 마음에서 접근했지만 고객들이 불편해한다는 것을 알았고, 필요한 시점에 가까이 다가가 응대를 했을 때 고객응대가 쉬웠다는 설명이다. 

예를 들면, 옷가게에 온 손님이 옷을 이것저것 살펴보고 있을 때는 먼발치에서 지켜보다가 택을 살피는 게 보이면 “사이즈 찾아드릴까요?”하고 필요한 도움을 주며 다가갈 때 고객들은 거부감 없이 받아 드린다는 것이다.  고객이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있을 때 너무 가까이 오면 부담스러워하는 것을 알고, 제대로 된 타이밍을 알아낸 세일즈 달인의 노하우이니 분명 검증된 방법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쇼핑할 때 점원의 응대가 참 편하게 느껴진 곳도 있고 반대로 불편해서 돌아 나온 적도 있으니 아마도 그런 타이밍과 거리의 차이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사회적인 타인과의 거리를 알고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서 내가 안전한 거리를 알고 그 상황에 “아니요, 괜찮아요,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라고 내가 원하고 바라는 바를 말할 수 있는 건강한 표현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말을 잘못해 다른 사람이 상처를 받지 않을까 불편하지 않을까 해서 참고 삼켰던 말이 나를 오래도록 괴롭히는 것을 보면 그냥 대충 참고 넘기는 것이 최선의 방법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건강한 표현법이란 나의 생각을 잘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상대에게 상처 주지 않는 방법이어야 할 것이다. 아니라는 표현이 단호할 필요는 있지만 부드럽게 전해져, 상대가 불쾌하거나 거부당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전달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감정이 중요한 만큼 상대의 기분과 감정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제법 커다란 풍선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이 풍선은 존중이라는 풍선이다. 이 풍선이 터져버리거나 날아가지 않도록 서로 배려하는 것. 그것을 염두해야 할 것이다. 너무 가까이 가면 터져 버릴 것이고, 방심하면 날아갈 것이기에 있는 그대로 보아주고 인정해주는 것, 상대가 다치지 않도록 보살피는 것이 우리가 마지막까지 애써야 할 소중한 삶의 가치가 아닐까.      


지오디 3집에 수록된 ‘하늘색 풍선’은 이런 가사로 시작된다. 

파란 하늘 하늘색 풍선은 우리 맘속에 영원할 거야.

너희들의 그 예쁜 마음을 우리가 항상 지켜줄 거야.     

지켜주고 싶은 마음. 상대가 누구든 휘두르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닌, 구속하거나 방관하는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 보아주고 존재하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 욕심내거나 포기하지 않고 애정 가득한 마음으로 한 발짝 멀리서 지켜보기, 그러다 도움을 요청하면 기꺼이 그 손을 잡아 주기,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닌 함께 사는 세상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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