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시나비 Mar 03. 2020

몬트리올의 겨울, 낭만적 ep. 9

초보 채식주의자의 실험

'어서와, 채식 처음이지?'


은 여기 와서 처음 읽은 책이 <아무튼 비건>이었다. 책이든 영화든 독자나 관객과 케미가 돋는 시점이 따로 있는 것 같다. 같은 내용이라도 어떤 때는 건성건성 넘어가기만, 어떤 때는 유난히 머리와 가슴에 와서 콱 박힌다. 이번에 <아무튼 비건>이 그랬다.


깊이 감동을 받은 김에 책에서 권하는 <지배자Dominion>이라는 다큐도 찾아서 보았다. 비건 배우로 유명한 호아킨 피닉스와 루니 마라 커플이 나레이션을 맡아 더 실감이 났다. 두 사람의 목소리는 기품이 있었지만, 공장식 축산으로 고통 받는 돼지와 소로 시뻘건 화면을 보고 있기가 참으로 괴로웠다.  웬만한 공포 영화보다도 강도가 높아 대부분 눈을 가리고 보다가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세상의 지배자인 인간이  얼마나 악하고 무서운 존재인지를 새삼 확인하고 나니 고기를 먹기가 두렵고 민망해졌다.


<아무튼 비건>의 김한민 저자가 권한대로 처음부터 완벽한 비건이 되려고 애쓰기 보다,  '무리하지 말고' 80% 정도 실천하고자 마음 먹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혹은 채식 메뉴가 없는 식당에서 다른 사람이랑 식사를 해야 하거나 식사 초대를 받아 어쩔 수없이  먹어야 하는 경우에는 죄책감 없는 먹는 걸로.


2017년 7월에 혼자 치앙마이 한달 살이를 할 때도 채식을 주로 했더랬다. 한국으로 돌아감과 동시에 와르르 무너져 버렸었지만. 고기 좋아하는 아들에게 매일 저녁밥을 해줘야 하고 점심 약속이 심심치 않게 많은 생활에서는 채식을 실천하기가 쉽지 않았다.

여기서는 핑계를 댈 수가 없다. 어차피 혼자 먹을 것만 챙기면 되고, 시내에는 채식 식당을 꽤나 많은데다 일반 식당에도 어김 없이 채식 메뉴가 '어서와, 채식은 처음이지'하고 반겨주니까.   


채식식당 도장깨기


1. LOV


이왕에 먹을 거, 근사한 채식 식당에서 먹고 싶어졌다. 이름하여 몬트리올의 채식식당 도장깨기! 평소에 식사비를 아껴 일주일에 한 번은 채식 식당에 투자하기로 한 것이다. 구글에다가 vegeterian restaurant montreal을 치니 솔찮이 많은 식당들이 방긋 얼굴을 내밀었다. 그 중에서도 어학원에서 가장 가까운 LOV를 일빠로 찍었다.


2월 14일, 어학원에서는 여기저기 핑크핑크한 하트 풍선을 장식하며 요란법석이었다. 한국에서는 그냥 남녀가 둘이서 초콜렛 주고 받으며 보내는 반면, 여기서는 동네 잔치라도 하듯 다같이 모여 포트럭 파티를 한다고 했다.  이건 좀 아닌데, 싶어 어학원 파티를 과감하게 째고 LOV로 걸음을 재촉했다.


에구야. LOV가 워낙 유명해서인지 발렌타인데이 때문인지 평일 점심 시간인데도 자리가 빈틈 없이 꽉 찼다. 예약 없이 무작정 온 것을 후회할 즈음, 영화배우급의 미모를 자랑하는 매니저가 바bar 자리라도 앉겠느냐고 물어왔다. 당근, 오브 코스.


뭘 골라야 할지 난감할 때는 오늘의 세트 메뉴가 제일 만만한 법. 'Express Menu라고 적힌 걸 적당히 시켰다. 샐러드대신 수프를, 두부요리 대신 버거를 선택한 후에 음료로는 카모마일 티를 달라고 했다. 콜리플라워 수프와 곁들여 나온 빵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양과 질 모든 면에서 흠잡을 데가 없었다. 다만, 채식버거는 영... 아니올시다 였다. 차라리 두부 요리를 시킬 걸, 이미 때는 늦었으니 최대한 열심히 먹어보려 했으나 결국 남기고 말았다. 비주얼은 좋았지만 패티가 너무 뻑뻑해서 실망스러웠다. 역시 채식버거는 맛이 없구나, 편견만 생겼다.


발렌타인데이를 채식 런치를 즐기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아무르Amour가 가득했으나 나는 홀로 외로히 바를 지키며 쓸쓸히 책을 읽었다. 옆에 앉은 20대 여성마저 책에다 얼굴을 고정하고 후다닥 먹은 후 나가버리자 더이상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2. Lola Rosa


두번째로 찍은 식당은 롤라 호자Lola Rosa였다. 곧 브라질로 돌아간다는 안토니오와 이야기도 좀 나눌 겸 점심을 먹기로 했다. 나더러 식당을 정하라기에 이때다 싶어 롤라 호자의 주소를 찍어주었다.


바람이 꽤나 차갑게 볼을 에이는 날, 맥길역에서 한참을 걸어 식당에 도착했더니 앞에 한 사람이 대기 중이었다. 월요일 점심 시간인데, 게다가 오후 1시인데 이렇게 붐빌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었다. 다행히 예약 한 건이 취소되는 바람에 오래 기다리지 않고 자리를 차지했다.


분위기가 LOV보다 훨씬 캐주얼하고 저녁도 착했다. 안토니오랑 나는 검은콩이 들어간 나쵸 2인분과 채소 라자냐를 시켰다. 안토니오는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의심스러운 눈치로 '고기가 없는 라자냐가 말이 되냐', '난 원래 검은콩을 싫어한다' 등등. 점잖은 말투로 투덜거렸다.


막상 나쵸와 라쟈나를 맛보고는 눈이 커지고 목소리가 높아지더니,  연신 "쎼봉 쎼봉 C'est bon. C'est bon." 이러면서 감탄하지 뭔가. 진짜 맛있었다. 집에 가서 자려고 눈 감고 누우면 생각날 맛이라고 할까. 채식이 이 정도로 맛있으면 반칙 아닌가 싶은 맛이었다. 이름하여 반칙의 맛!


돌아오는 수요일(3월 4일)에도 핑계거리가 생겼다. 마침 얼마 전에 사귄 미미언니가 밥 먹자고 연락을 준 것이었다.야호, 이번에는 다른 롤라 호자 지점을 콕 찍어 예약까지 했다. 검은콩 나쵸는 기본으로 시키고 뭘 또 탐색해 볼까, 두근두근 기대기대.


         (채식식당 도장깨기: To be continued)

라탄으로 엮은 등 장식이 멋스럽다.

식물과 타이프라이터가 이렇게 어울리다니. 문학 감성도 몽글몽글

콜리플라워 수프와 천연발효빵.

버거보다는 감자튀김이 훨씬 더 맛나다

월요일 점심 시간. 롤라 호자를 가득 메운 채식인들.

나쵸나쵸나쵸. 이제까지 허접한 나쵸는 잊어라.

채소가 고마워지는 맛. 고기 없이도 훌륭한 라자냐+시저 샐러드.

 


   

작가의 이전글 몬트리올의 겨울, 낭만적 ep.8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