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에게 훌륭한 한 끼를 선물하고 싶어
심심한 재택근무 생활이 이어지던 날이다. 방송국에서 일하는 친한 친구가 편집을 마치고 놀러 오기로 했고, 그가 사준 1리터 위스키 (실은, 사준 것이 아니라 사서 우리 집에 잠시 맡겨둔 위스키)를 거의 다 먹은 나는 그에게 저녁을 대접하는 것으로 죗값을 치르기로 했다. 위스키만큼 비싸지는 않지만, 음식을 대접하는 것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정성이 들어가 있으니까.
집에 있는 것을 찬찬히 살펴봤다. 어제 아침 끓여놓은 된장찌개, 마트에서 샀지만, 사용처를 찾지 못한 바지락, 그리고 라면 몇 봉. 풍족하지 않지만 이 정도면 훌륭한 한 끼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다. 바지락은 된장찌개에 넣어도 라면에 넣어도 좋겠어. 구글의 도움 없이도 사용처를 찾아내다니. 요리 초보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감각이 있는 초보가 아닐까. 요리를 잘하는 사람들은 요리할 때마다 마트에 가지 않아도 냉장고에 있는 것으로 잘만 요리하던데.
친구가 집에 도착했고, 그의 손에는 와인이 들려있었다. 고마운 친구. 나는 1리터짜리 위스키를 말도 안 하고 홀짝홀짝 다 마셨는데 또 술을 사오다니. 고마운 마음으로 친구에게 된장찌개와 밥이 준비되어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냄비를 여는 순간 무언가 이상한 것을 직감했다. 뭔가 어제와 색이 다른 것 같은데, 시큼한 냄새도 난다. 친구가 옆에서 헛구역질하는 순간 나는 그 된장찌개가 쉬었다는 것을 알았다. 아, 난방 없이도 25도를 유지하는 우리 집에서는 하루만 지나도 음식이 상하는구나. 그리고 찌개와 국은 틈틈이 끓여야 하는구나. 친구가 옆에서 계속 헛구역질을 하는 동안 배달을 시키고, 빠른 손으로 음식물쓰레기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찌개를 뒤적이고 나서야 역한 느낌이 들었지만, 나의 오감은 방송국에서 일하는 인간만큼 예민하지 않았기에 오래지 않아 문제의 된장찌개를 정리할 수 있었다. 뭔가 많이 꼬였다. 지금 시각이면 친구가 내가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었어야 했는데.
내가 음식물 쓰레기를 정리하는 동안 친구가 와인을 오픈하고 있었다. 스크루를 바로 넣으면 어떡해. 나이프로 와인 호일부터 제거해야지. 답답한 친구에게 괜한 핀잔을 주었다. 나는 절차와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된장찌개는 실패했지만 와인따는 건 익숙하다. 독립하면서 매주 와인을 마셨으니까. 능숙하게 호일을 제거하고, 코르크에 스크루를 관통시켰다. 이렇게 깊숙이 넣어야 양 날개가 올라오지. 핀잔을 이어갔다.
또깍.
코르크에서 또깍 소리가 날 리 없는데. 뽕! 하고 경쾌한 소리가 나야 하는데. 유심히 보니 스크루가 부서졌다. 독립 후 6개월 내내 잘 쓰던 와인오프너가 오늘 부서진다고? 와인오프너의 내구성을 1도 믿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오늘 부러지는 건 너무했다. 친구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으면 구글링을 시작했다. 못과 망치를 이용해서 와인을 따는 법. 칼을 꽂아 와인을 따는 법. 벽과 수건, 벽과 신발을 이용하는 법. 토치 버너를 이용하는 법. 와인을 따는 데 공구 통이 나설 일인가. 블로그에서 아무리 살살, 천천히, 살짝을 강조해서 와인오프너 없이 와인 따는 법을 설명해도 공구로 와인을 후려친 뒤 뒷정리하는 내 모습만 그려졌다. 캔들라이터로 입구를 넓히고, 못을 코르크에 박았다. 그리고 지렛대 원리를 이용해서 못을 들어 올려 본다. 하나, 둘. 유리가 갈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와인을 깨버린 뒤의 현장 분위기를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다. 편의점에서 나이프도, 지지대도 없는 싸구려 와인오프너를 사서 힘을 써본다.
뽕.
개고생을 한 뒤 겨우 와인을 오픈 할 수 있었다. 집인데 집에 가고 싶었다. 1시간 안에 기억 속에 남은 건 썩은 된장찌개와 부서진 와인오프너 뿐이라니. 그래도 우리의 구호를 외쳤다. 망가지자! 흐트러지자! 실수하자! 그래도 와인은 달았다. 썩은 된장찌개로 파티를 시작했지만 치킨과 와인은 참 달구나. 하지만, 매번 식비로 20만원을 태워버리는 우리에게 치킨 한마리는 너무 부족했다. 아, 집에 있던 바지락이 생각났다. 밤에 먹는 바지락 라면은 정말 꿀맛일 것 같다.
썩은 된장찌개에서 모든 것을 멈췄어야 했는데, 그게 아니라면 평소대로 끓인 라면에 바지락만 넣었어야 했는데. 요리 꿈나무는 또 색다른 방법으로 바지락 라면을 만들어보기로 했던 것이다. 이연복 선생님이 라면으로 짬뽕 맛을 냈던 것이 기억났다. 기름을 둘러서 해산물과 야채들을 볶고 그다음에 라면을 끓이면 기막힌 짬뽕라면이 만들어졌다. 이거야말로 쉬우면서 그럴듯한 요리지.
후라이팬을 달궈서 올리브유를 둘렀다. 양파, 대파를 넣고 그다음 바지락을 볶아야지. 그리고 바지락을 넣는 순간 치이익- 하는 소리가 났다. 요리 유튜버가 치이익- 소리가 나면 성공한 것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리고 이상한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연기가 너무 많이 난다. 연기가 나면 맛있는 건가? 아닌가? 문을 열어야 하나? 고민하는 순간 익숙한 싸이렌 소리가 들렸다.
“화재발생, 화재발생”
C발. 신이시여. 연기가 나면 맛있고 아니고를 고민할 때가 아니었다. 이미 집에 뿌연 연기가 가득 차기 시작했다. 냄비를 옆으로 옮기고, 물에 적신 행주로 화재 경보기를 틀어막고, 친구는 급하게 거실, 작은방, 안방의 창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래도 화재 경보기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화재발생, 화재발생”
끔찍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지금 시각은 12시 10분. 내가 울린 화재경보 때문에 동네 사람들이 모두 뛰쳐나온다. 죄송한 표정을 지으면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나를 쳐다보는 이들 중에서는 같은 동네에 사는 회사동료도 여럿 있겠지. 끔찍하다.
“화재발생, 화재..”
친구가 화재 경보기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화재경보가 멈췄다. 그리고 둘은 세상 다 산 표정으로 바닥에 앉았다. 오늘 이후로 이 친구를 집으로 초대할 수 있을까. 몇 분이 지난 뒤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정말 집에 가고 싶다. 퇴근하기 위해 버틴 9시간보다, 친구가 온 뒤 3시간이 더 길게 느껴졌다.
썩은 된장찌개에서 모든 것을 끝냈어야 했는데. 그렇게 또 몇 분이 지난 뒤 볶다 만 야채와 바지락이 생각났다. 너희도 아직 살아있구나. 생각해보니 이연복 선생님도 해산물은 따로 넣었던 것 같다. 그럼 짬뽕맛은 어떻게 낸 거지. 역시 대가는 다른 것일까. 곱씹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야채와 바지락을 볶았던 냄비에 물과 라면스프를 넣었다.
12시 30분. 친구와 나는 마주 보고 앉아 말없이 라면을 먹었다. 해산물 맛이 일품이었다.
이 모든 고통을 겪고 12시 30분에 라면을 먹으면서 맛있다는 생각을 하다니.
친구도 지친 표정으로 라면을 먹고 있다.
나는 다시 바지락을 먹을 수 있을까. 나는 이 친구를 다시 볼 수 있을까.
긴 밤이 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