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의 글을 쓰기에 앞서 생뚱맞은 소리를 잠시 하자면 누구나 그렇듯 나 또한 여행을 매우 좋아한다. 혼자 무계획으로 가는 배낭여행부터 친구들과 함께하는 여행까지 1년의 평균 2~3번 이상은 다닐 정도로 Yolo 족에 가까웠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시간이 지나니 내가 당시 다녔던 여행지에서 받은 생생하고 소중했던 기억들이 잊혀져 감을 느끼며 아쉬움이 점점 커져만 갔다. 특히나 사회생활을 정신없이 하다 보면 그 기억들은 더욱더 빨리 내 머릿속에서 지워져 감을 느꼈다. ( 사실 기억력도 썩 좋진 못하다:) )
그래서 매 순간 여행하며 느꼈던 생생한 기억들을 잊지 않고 간직하기 위해 2015년부터 'Brunch'라는 App을 통해 수능 언어 4등급의 굉장한 언어술사? 의 실력을 기반으로 두서없는 글들을 써내려 갔다. 이런 마음가짐이 가히 1년 정도 지나갔을까 스스로의 타협을 통해 현재까지 이 마저 지키지 못했다.
그래서..
다시금 기억의 저장소로 남기자라는 재 다짐?을 거진 5년 만에 다시 키보드를 잡았다. 주제는 여행에 국한되지 않은 내가 남기고 싶은 모든 것! 하여 첫 주제는 8월에 읽은 최용범 글쓴이의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에대한 독후감이다.
평소 책과는 있는 담은 모조리 쌓고 지내왔던 필자는 무식함이 도를 지나쳐 7월부터 'A book , one month!'(한 달에 책 한 권 읽기!)를 다짐했다. 7월 '룬샷'이라는 회사 기업관에 관련한어려운 책을 시작으로 8월 2번째 책인 역사책 1권과 씨름 끝에 다 읽고 이에 대한 필자에게 기억에 남는 사건들 위주의 생각을 글로 남겨보고자 한다.
책을 요약하자면..
2018년 문재인 대통령 당선까지의 역사를 400여 페이지에 실어놓은 초고압축 역사책이다.(1페이지에 5년... 필자의 역사는 6페이지...) 해서 정말 그 시절의 중요했던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을 중심으로 아주 짤막하게 요약한 책으로 대한민국의 역사를 Quick 하게 볼 수 있는 어렵지 않고 쉽게 풀어쓴 책이다.(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겐 한 달이 걸렸다.)
[1장] 선사문화와 고대 국가 건설_고조선의 성립과 삼국시대의 전개
단군신화부터 통일신라 전까지의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이 장을 통해 다시 한번 외세의 힘을 빌려 반쪽짜리 통일을 한 신라(물론 이것도 정말 역사적으로 대단한 일이다.)가 아닌 동북쪽으로는 블라디보스톡 아래까지, 서쪽까지는 요동반도까지 땅을 넓힌 광개토 대왕과 만주까지 포함한 독자적 제국으로 발전하기 위해 평양 천도를 강행한 장수왕이 있는 고구려 위주의 자주적 민족 통일을 이루었다면?
백제의 문주왕(?~477) 시절 수도를 공주가 아닌 여주로 옮겨 고구려의 레이더망에 포착됐다면, 그리하여 고구려 위주의 삼국 통일이 됐다면?
지금쯤 우리는 횡단 열차를 타고 유럽을 넘나들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운 생각을 해본다.
(학창 시절 제2외국어가 독일어였는데, 일도 써먹지 못했다.)
[2장] 통일신라와 발해_삼국통일을 거쳐 남북국시대로
통일신라 이후 고구려를 계승하여 대조영이 세운 해동성국 발해의 역사가 대한민국의 역사로 엄연히 편입돼야 한다는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 기술한 내용들이 흥미롭다. 옛 고구려의 영토를 대부분 회복하고 일본 등과도 활발한 교역을 통해 경제력까지 갖추었다고 한다. 동시에 신라와 대립하면서도 한민족의 모습을 보여주는 등의 역사적 사실들을 보았지만 내부 분열로 인해 926년 거란의 침략으로 고작 사흘 만에 무너진 거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 반쪽짜리 통일신라였음에도 발해라는 나라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면, 삼국통일의 주역이 고구려였다면 하는 아쉬움을 대신할 수 있었던 2번째 기회가 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통일신라 말기 사회혼란의 원인인 '골품제 사회'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출신에 따라 자신이 올라갈 수 있는 정도가 정해져 있다니? 그 무슨 불공평한 처사인가 싶다. 물론 현재는 그렇지 않다. 자신이 잘하는 만큼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 얼마든지 열려 있다.
*골품제 사회: 혈통에 따라 신분을 나눈 제도
[3장] 고려시대_후삼국 통일에서 위화도 회군까지
통일신라 후기 견훤의 후백제부터 궁예의 중앙집권제로 인한 쿠데타까지 후삼국을 통일하여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의 얘기가 시작된다. 강력한 왕권을 행사할 수 없던 태조 왕건은 세력을 넓히기 위해 각 지방 호족들의 딸과의 혼인을 감행했다. 그것도 29명의 부인과 혼인을 하며 인적 네트워크형 정치 결사체를 이루어 하나의 열린?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고려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만든 나라이기도하다. 허나 이 책에는 '세계 최초'란 딱지가 부끄럽다 라고 쓰여 있어 그 이유를 보자 하니 다음과 같았다. 고려가 만든 금속활자 시기보다 73년이나 더 뒤에 만든 구텐베르크는 금속활자에 이어 인쇄기를 발명했으며 그에 맞는 적합한 잉크를 개발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지식의 대량 보급이 가능해지게 되며 서양의 역사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 고려의 '금속활자'는 대중적 보급이라는 역할을 수행한 역사적 증거를 찾을 수가 없다고 한다. '최초'의 진정한 가치는 발전의 단초가 될 때 빛나는 것이다. 즉 최초를 통해 선순환적 구조로 나라를 발전시킬 수 있는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
이 '최초'라는 단어를 들으니, 필자가 다니는 회사도 '5G 세계 최초'라는 Title을 가지고 있는데 "그래서 그다음은?"라는 물음표를 던져보게 된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고려 말기, 특권층인 권문세족의 농민 수탈로 인하여 세금을 낼 평민들이 적어지고 그로 인해 국고가 고갈되어 위기에 봉착했다. 고려 토지제도의 근간인 '전시과 제도'를 해결하기 위해 고려의 왕들은 그간 많은 개혁을 시도했으며 마지막으로 공민왕이 신돈을 앞세워 개혁을 주도했으나, 결국 권문세족의 반발로 이 또한 실패하고 말았다.(전시과 제도의 본 목적은 국가가 토지의 관리 및 처분권을 가짐으로 수조권 분급에 의한 지배 질서를 확립하고자 하는 목적이다.)
*전시과 제도 : 후삼국 통일 과정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지급했던 논공행상적 성격의 토지제도
결국 이성계, 조준, 정도전 등 신진사대부들의 목숨까지 내놓은 새로운 왕조의 개창에 의해서야 해소되었고, 이는 1388년 이성계가 요동정벌에 나서다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군사들을 돌려 정변을 일으키고 권력을 장악한 사건인 '위화도 회군'에 의해 500년 조선왕조를 열게 되었다.
[4장] 조선시대_근세의 태평시대를 거쳐 민중반란까지
조선왕조를 건국하면서 그 옆에는 정도전(1342~1398)이라는 설계자가 있었다. 유교적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통치 규범을 종합적으로 제시하는 '조선경국전'을 편찬하며 지금의 4대 문(숙정문, 흥인지문, 숭례문, 돈의문)의 이름을 짓고 한양성 설계를 직접 했으며, 북방으로는 요동정벌 준비까지 나아간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입헌군주제'라고 할 수 있는 재상 중심의 정치노선을 견지했던 정도전은, 태조 이후 강력한 군주제를 지향했던 이방원의 걸림돌이 되어 결국 암살을 당하고 말았다. 정치적인 색깔이 맞지 않으면 서로를 가만히 두지 않는 행태는 그 어느 시대에도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한다.
(요즘의 행태를 보면 조선시대처럼 죽이지만 않았을 뿐 기득권 세력들의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엄청난 저항을 하고 있는 것을 최근 일어난 여러 사건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입헌군주제 : 군주가 헌법에서 정한 제한된 권력을 가지고 다스리는 정치 체제. 군주의 권한은 형식적. 의례적이며 실질적으로는 내각에 정치적 권한과 책임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3 개 지상파 방송사인 KBS, SBS, MBC와 같은 언론 기능을 맡은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이라는 3사가 존재했다. 당시 정승, 판서도 이 3사의 관원을 함부로 할 수 없었고, 임금과 국정 시책을 논하여 관료들의 시시비비를 가렸다고 한다. 이 3사의 관원의 탄핵을 받은 관료는 감찰을 받아야 했다. 이런 막강한 기관인 3사에서 일하려면 학문적 깊이가 있고 시국에 대한 정보와 판단이 빨라야 했다. 그리고 인품도 뒷받침돼야 하므로 평판 좋고 강직한 인물이 주로 이 자리를 맡았다고 한다. 지금의 언론사와 비교했을 때 어떤 생각이 들까?
추가로 백성 가운데 원통하고 억울한 한을 품은 자에 대해 들어주기 위한 '신문고'가 있었다.(지금의 국민청원이라고 보면 된다.)
우리나라 국민의 문해율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왜 그럴까? 바로 세종대왕(조선 4대 왕, 1418-1450)의 한글 창제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1466년 '훈민정음'을 공식 반포하였다. 훈민정음의 뜻은 '백성을 깨우치는 바른 소리'라고 한다. 이 메시지는 최초의 저작물 '용비어천가'를 보면 알 수가 있다고 한다. 이로써 지배층과 피지배층 간의 소통 시스템이 한층 더 원활해졌고 어려운 한자를 일일이 배울 필요가 없었다.(물론 한글은 조선시대 내내 홀대를 받았다.)
고려시대 말 권문세족이 있었다면, 조선시대에는 훈구세력이 있다. 2대 태종 때부터 공신을 받아오며, 신하들이 직접 왕(연산군)을 몰아내고 새 임금을 추대했던 중종반정(11대 왕, 1506~1544)으로 공신 세력의 힘은 더욱더 강해졌다. 이들은 점점 조선의 특권층으로 구축하여 기득권을 과시하며 평민들의 토지를 빼앗고, 대규모 농장을 조성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그 결과 국고는 점차 피폐해져 고려 말 권문세족에 의한 농촌이 그러했듯, 농민들이 특권 세력의 수탈을 피해 전국을 유랑하는 유망현상까지 생길 지경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으로 개혁이 절실했고, 이에 선두를 선 인물은 반대파 '사림파'의 조광조(1482~1519)였다. 그는 성리학적 이상 국가를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정치, 언론 활동을 강화했으며, 신료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낭관권을 강화시켰다. 이를 통한 개혁이 성과를 거두고 있어 마침내 '위훈삭제'라는 거짓 공훈을 내세워 공신이 된 이들을 골라 공신 명단에서 삭제하는 조치를 강행했으나, 기득권 훈구세력의 반발로 인한 역모 공작으로 '기묘사화'라는 사림파의 대대적인 숙청작업으로 이 개혁 또한 막을 내리게 됐다.
*위훈삭제 : 중종반정 때 공을 세운 정국공신 중 자격이 없다고 평가된 사람들의 공신호를 박찰하고 토지와 노비를 환수한 사건
이런 역사적 사건은 그 후에도 반복됐다. 광복 이후 거짓 공훈으로 독립투사로 둔갑한 인물들과 일제시대에 변절하여 대한민국의 적이 되고 국민을 사살했던 친일파들을 찾아내어 진상규명을 하기 위해 지금까지도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일제 해방부터 미국의 적극적인 신탁통치로 남북이 갈라선 채 통일신라와 같은 반쪽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설립할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 속에서 친일&친미파 위주의 기득권 세력이 자리를 잡게 되어 조선시대와 같이 친일파를 숙청? 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물론 을사오적의 이완용 같이 성과는 있었다.)
마지막으로 '쇄국정책'의 아이콘인 흥선대원군(1820~1898)에 대한 얘기를 잠시 하고 조선시대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쇄국정책 : 다른 나라와 관계를 맺지 않고 문호를 굳게 닫아 서로 통상하지 않는 정책
외국과 왕성한 교역통상을 전개한 고려와는 달리 조선왕조는 건국초부터 쇄국정책을 고수하여 대표적인 중국과 일본 두 나라와 폐쇄적인 사대교린 관계만을 유지하였다. 더욱이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은 문호를 개방한 탓에 영국, 프랑스 연합군의 침공 등이 있어 왕조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차단하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결국 프랑스 신부와 천주교도를 처형한 사건인 '병인박해'로 이어지고 이로 인한 프랑스 공격의 구실이 되어 '병인양요'를 겪게 되었다. 또한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병력 1천2백여 명을 동원한 '신미양요' 사건마저 겪게 되고 그 후 강화도조약을 통해 일본의 긴 통치가 시작되었다.
이처럼 근대사회 발전에 토대가 될 수 있음에도 '쇄국정책'으로 사회발전이 멈춤으로써 조선은 시간이 멈추어 버린 셈이었고, 그와 관련된 역사적 사건들이 많이 발생하였다.
이 비슷한 사건은 현재에도 유사하게 나타났다. 필자가 중, 고등학생 때만 해도 굉장히 핫했던 MP3 아이리버와 DSLR의 황태자인 소닉, 니콘, 캐논 등 일명 핫 Item 들은 스티븐 잡스의 아이팟, 아이폰 의 출시와 삼성의 갤럭시 출시로 인하여 완전 시장이 바뀌었다. 또한, 국내 3 통신사의 가장 큰 수입인 문자와 2000년대 감성시대 당시 가장 인기 있던 '싸이월드', '네이트온' 등 SNS 시대를 완전히 매장시킨 '카카오톡',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이 있다. 이런 New Item 들의 등장이 주는 시사점은 과연 무엇일까?
[5장] 근대의 전개와 현대사회의 성립_제국주의 침략에서 민주국가 수립까지
1876년 조선은 일방적으로 맺은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조약'을 통해 일본에 대한 경제적 침탈의 기회까지 내어주고 말았다. 이는 서구와 불평등 조약으로 입은 피해를 조선을 통해 상쇄시키고자 하는 일본의 목적이었으며, 이 조약으로 인하여 이후 군사적 침략의 발판을 제공하게 되었다.
또한, 1882년 미국과 맺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은 미국에 최혜국 대우를 해줄 것을 명시한 조약으로 이 또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를 통해 미국 또한 일본에게 허용된 모든 특혜를 누릴 수 있게 됐다. 그 후에도 영국,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 오스트리아와 통상조약을 맺었다.
이런 제국주의 나라들의 바둑판이 된 조선 내에서는 '임오군란'(1882년), 김옥균 등의 개화파가 일으킨'갑신정변'(1884년) 등이 연이어 일어나게 되었다.
*임오군란(1882년): 13달 동안 봉급미를 받지 못하고 겨우 한 달치 급료마저도 변변치 못한 처우에 격분한 구식군대가 일으킨 병란으로 흥선대원군의 재집권으로 이어진 사건이지만, 청나라의 군대로 인하여 약 한 달간의 재집권은 단명에 그치고 말았다. 이 난은 대외적으로는 청나라와 일본의 조선에 대한 권한을 확대시켜주는 결과가 되었다.
*갑신정변(1884년):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 개화파가 개화사상을 바탕으로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
이렇듯 어지러운 조선 말기 시대에 동학의 사상을 지향한 최제우를 필두로 동학농민혁명이 준비되고 있었고, 2대 최시우를 통해 4~5만 명이 모인 하나의 큰 집회가 되었다. 그 후 전봉준(1855~1895)은 '동학농민운동'으로 1894년 1월 첫 봉기를 일으켰다. 비록 결과적으로는 처참한 패배를 당했지만 민중 스스로 자주적 근대화로 갈 수 있음을 보여준 최초의 혁명운동으로서의 그 역사적 의미는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동학농민운동 이후'을미사변'(1895년)도 모자라 1905년 11월 17일 기관총과 대포로 무장한 일본군들 사이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강압적으로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했다. 이로 인해 한국은 외교권을 잃어 독립군의 지위를 상실한 보호국으로 전락하고, 이후 1907년 '정미 7 조약'을 통해 내정 감독관마저 빼앗기면서 사실살 국권을 탈취당했다. 을사조약은 이 책에서도 다루지만 엄연한 국제적 불법 조약이다.첫째, 강압에 의해 체결되었으며, 둘째, 한국 황제의 서명과 수결이 없었다. 지금으로 따지만 문재인 대통령 서명 없이 국가 간 협약이 체결됐다는 것인데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울화가 치미는 일이 아닌지 모르겠다.
*을미사변(1895년):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주동이 되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일본세력 강화를 획책한 정변
1919년 3월 1일 파고다공원에 모인 학생들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운동을 벌였고, 그 후 만세운동의 불길은 전국적으로 타올랐다. 3.1 운동은 인구의 85% 를 점하는 농민이 주역이 되고, 노동자는 파업으로, 학생들은 대중 시위와 동맹휴학 등으로 투쟁했던, 그야말로 전국적 전 민족적 투쟁이었다. 같은 해 6월 파리 강화 회의에서 한국 문제에 대해 별다른 거론 없이 끝나 버리자 3.1 운동은 소강상태에 빠져들었고, 미국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옹호했다. 그러나 3.1 운동으로 인하여 독립운동의 주체는 자주적 독립 투쟁 노선으로 옮겨가며 역사는 그렇게 바뀌어갔고, 전 세계 식민지 국가의 민중들에게 많은 희망을 안겨 주었다.
같은 해 6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하는 임시정부가 수립되며, 민주공화제를 이념으로 3권 분립제(입법, 사법, 행정)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2월 이승만이 한국의 위임통치를 청원하는 문서를 미 국무성과 신문사에 보낸 것이 알려지면서 그에 대한 비판이 거세졌으나, 이승만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고 책임회피를 일삼았다. 이러한 언동으로 인해 임시정부는 통일된 대오도 권위도 유지할 수 없었다.
당시의 일본 식민지에서 미국으로, 갑에서 을로 바꾸는 것에 지나지 않는 행동을 이해할 수 없지만, 김구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후 1937년 중일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전시체제에 돌입했고, 한국에 대한 물적, 인적 약탈을 더욱더 무자비하게 자행했다. 한국인 480여만 명이 여러 곳으로 끌려가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고 노동에 시달렸으며, 일본은 보안 유지로 5,800여 명의 대학살을 자행했다. 나아가 21만 명의 한국인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끌려가 대다수가 전사했으며, 위안부로 최소 5만 명의 한국 여성을 끌고 가 일본 군인들의 무차별한 성적 학대에 시달렸고, 이에 대한 후유증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이런 인간으로서의 할 수 없는 반인륜적 범죄행위를 저질렀음에도 일본 우익들은 이를 부인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뻔뻔스러운 언행을 아직도 자행하고 있음에 이 얼마나 통탄할 노릇인지 모른다.
이런 반인륜적인 행동을 자행해오던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였고, 히로히토는 1945년 8월 15일 항복을 발표하며 36년간의 식민통치를 벗어난 한반도가 해방됐다. 그러나 미국의 외압으로 자주 민족통일을 이루지 못한 신탁통치가 거론되며 이에 대한 찬반 논란으로 결국 돌이킬 수 없는 70년에 가까운 남북 분단을 가져오게 됐다.
이로 인해 남한의 친일파가 청산되지 못함은 물론이고 경찰 조직의 82%가 전직 일본 경찰 출신들이었으며, 박정희, 전 국무총리인 정일권 등 대표적인 일본군 출신 장교들이 요직을 차지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1948년 9월 7월 '반민족 행위 처벌법'을 가결시키고 1949년 1월 1일부터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 간들 제대로 시행이나 됐을까? 고작 7명 실형, 5명 집행유예를 언도하는 것으로 끝났다.
결국 타국으로부터의 간접 해방 친일파 처벌 실패로, 이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같은 동족 내 학살극이 벌어졌다. 제주도민 3만여 명을 학살한 '제주 4.3 사건', 전두환 시절 수천 명의 시민 학생이 학살된 '5.18 광주 민주화 운동'까지 정말 역사적으로 개탄스러운 사건이었다.
*제주 4.3 사건(1948~1954):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에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5.18 광주 민주화 운동(1980년): 1980년 광주 시민과 전라 도민들이 중심이 되어 전두환 보안사령관 및 12.12 사태를 발생시킨 신군부 세력의 퇴진과 김대중 등 민주정치 지도자 석방 등을 요구하며 일어난 운동
유명한 말이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또 그런말이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라고..글을 쓰고 한번 읽어보니 대부분의 기억에 남는 역사적 사건들은 긍정적인 부분보다 부정적인 면들이 많은 것 같은데, 당장 내 자신 한 명이 역사를 바로 안다고 이 세상이 바로 잡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역사적 사실에 대해 바로는 알고 있어야 하겠다 라는 생각을 해보며 재미 없는 후기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