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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웅 Feb 25. 2024

202402, 교토여행기(1)

  숙소가 있는 교토고쇼 앞에서 버스를 타고 난젠지에서 가장 가까운 정류장에서 내렸다.  가깝다고는 하지만, 난젠지까지는 걸어서 800 미터 정도를 걸어야 했다.  요즘은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여행을 할 때엔 스마트폰에 있는 구글지도나 애플지도를 활용한다.  낯선 도시에서 버스나 지하철을 탈 때에도, 모르는 길을 걸을 때에도 지도 어플리케이션은 98% 정도의 유용성을 보여준다.  이제는 익숙한 이 간편함은 언제부터 우리를 잠식했을까?  지난 여름 나가사키에서 백인 노인부부가 큼직한 종이지도를 펼치고 지나가는 행인에 길을 물어보는 모습을 보았다.  ‘맞아, 예전 젊은 시절 여행을 할 때엔 나도 종이지도를 들고 길을 찾았었지.’. 세상의 변화는 강렬했는데, 우리는 그 충격을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지도앱을 열고 난젠지까지의 경로를 따라 길을 걸었다.  교토에서 길을 걷는 일은 편안하고 즐거운 일이었다.  4년 만에 느끼는 이 편안함.. 문득 내가 느끼는 이 편안함과 즐거움은 여행지 어디서든 느끼는 그런것은 아닌가 잠시 생각해보았다.  알 수는 없었다.  해외여행이라야 고작 동남아 몇 군데가 전부고, 일본은 교토를 포함해 오사카와 나가사키, 후쿠오카가 전부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다른 여행지에서도 많이 걷는 편인데도 교토만큼의 정취는 즐기지 못한다.  걸어서 즐길 수 있는, 도시 자체가 품은 어떤 분위기를 교토만큼 느꼈던 여행지는 없었던 듯 하다.  모를 일이지..  나는 아직 한 번도 유럽이나 오랜 시간을 품은 다른 도시들을 다녀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작은 소로길을 따라 걷다가 주택가에 들어섰다.  앞에는 백인 커플이 우리처럼 어딘가를 목적으로 걷고 있었다.  주택가 골목을 따라 직진을 하면 젠린지였다.  그들은 그대로 방향을 틀지 않고 젠린지로 들어갔다.  우리는 입구 바로 앞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틀어 난젠지로 향했다.  길이 익숙했다.  4년 전 우리는 난젠지를 먼저 들른 다음 반대방향으로 이 길을 따라 철학자의 길로 갔었다.  길 옆으로 맑은 물이 흐르는 작은 수로가 길을 따라 있었다.  노무라 미술관과 히가시야마 중고등학교를 지났다.  교복을 입은 학생 몇몇이 늦은 아침에 학교에 들어서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학교를 오가야 하는 지루한 길이, 나에게는 오랜만에 찾은 반가운 길이었다.  여행이란 그러했다.  타인들이 평범하게 살고 있는 공간에 들어가 낯섬과 새로움을 느끼는 경험.  따라서 여행은 겸손하고 주의해야 한다.  평범함이 방해받거나 흐트러지지 않도록, 그림자 없는 존재의 정체성을 항상 깨달아가며, 걸음과 시선을 살펴야 한다. 


  그림자를 가진 존재로서 평범함을 유지하고 살던 나는 답답함이 점점 쌓이고 있었다.  SNS에 올라오는 타인들의 여행기와 내 진료실을 찾아오는 여행객들을 만나면서, 잠시라도 내가 있는 공간을 벗어나 머무르고 싶은 마음이 짙어졌다.  내가 사는 제주도 여행지이지만, 나는 그저 이 섬에 사는 주민이고 내가 그림자를 드리우고 일상을 살아가는 터전일 뿐이다.  진료실에 하루 종일 앉아있는 일은 지박령의 기분을 느끼는 일이다.  시선도 생각도 굳어가는 느낌이다.  다른 공간을 잠깐이라도 경험해야 시선과 생각도 좀 돌아갈 것 같다는 억지를 더해, 명절 연휴는 일본여행을 하기로 결정했다.  온전히 즐길 수 있는 시간은 단 이틀 뿐이니, 그 시간을 즐기기에는 가까운 일본만한 데가 없었다.  사실 일본여행은 아직 완성하지 못한 퍼즐처럼 남겨둔 여행지가 있었다.  큐슈의 히라도, 운젠, 시마바라, 그리고 나가사키 주변의 몇몇 곳들..16-19세기 천주교 박해사에서 나타난 기리시탄들의 흔적과 역사를 주제로 한 지난 여름의 나가사키 여행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다.  가고 싶었다.  덥지 않은 겨울 이 시기에 말이다.  하지만, 제주에서는 후쿠오카 직항이 없어서 인천을 경유해야 했다.  길지 않은 시간에 너무 빠듯한 일정이었다.  대신, 간사이 직항을 따라 내가 제일 좋아하는 도시인 교토에 가기로 결정했다. 


  교토는 자체만으로 언제든 가고싶은 도시였다.  그러니, 말 그대로 언제든 가겠다는 마음을 품으면, 주저없이 가는 그런 곳이었다.  단, 너무 짧은 일정에 욕심을 욱여넣지 않아야 했다.  교토는 이번으로 4번째 방문이었다.  이제는 유명한 여행장소를 찾아다니는 것 보다는, 도시 자체의 분위기와 여유를 즐겨보는 일이 여행의 목적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 욕심없이 여유를 즐기다 오려면 동선을 어떻게 정해야 할까.. 출발 한 달 전부터 고민했다.  난젠지의 수로각과 철학자의 길은 반드시 보고 싶었다.  유홍준의 교토여행기를 따라 아직 보지 못한 치텐조(피의 천장)을 이번에는 꼭 봐야겠다 다짐했다.  이것으로 충분할까?  혹시 아라시야마는 가 볼 수 있을까?  남쪽의 사케마을도 궁금했다.  그리고, 고급하고 앤틱한 문구류들을 좀 둘러보고 싶었다.  벌써 욕심이 넘치는 일정이었다.  여행의 목적을 정리했다.  난젠지의 수로각과 철학자의 길을 들르고, 치텐조와 관련한 장소들을 둘러보는 것으로 말이다.  문구류를 살피는 일은 시내 번화가에 집중되어 있으니 다니기는 어렵지 않을 듯 했고, 먹거리는 일단 염두에 두지 않았다.  

  간사이 공항에서 내려 하루카 열차를 타고 한 시간 반을 달리니 교토역이었다.  교토고쇼 앞의 숙소에 체크인을 한 시간은 밤 9시가 아직이었다.  교토의 밤거리는 가로등이 별로 없이 어두웠고 그 길을 집으로 향하는 몇몇 사람들과 자전거들이 채우고 있었다.  불빛이 아예 없는 집들과 집 입구만 아담하게 비추는 불빛들 사이에서 우리는 저녁을 먹을 수 있는 집을 찾아야 했다.  간단한 술과 저녁겸 안주를 먹을 수 있는 집을 찾아갔는데, 교토 브루어리의 맥주들과 교토식의 반찬안주를 내주는 집이었다.  나는 IPA를 주문하여 안주와 함께 마셨다.  엔화가 저렴하다고는 하지만, 맥주가격과 안주의 양과 가격을 따지자면 일본은 그리 저렴하게 즐길 수 있는 여행지는 아님을 느꼈다.  하지만 배는 채워야지..  교토 브루어리의 IPA를 마셔봤으니, 우리는 가게를 나와 바로 옆 야키소바집에서 나마비루에 몇가지 메뉴를 주문했다. 


  2월 초지만 춥지는 않았다.  구름없이 날이 맑고 바닷가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약간 건조한 차가운 산공기가 새로웠다.  걸음을 천천히 옮기다 보니, 높다란 나무들이 가까워지고 사람들이 좀 더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무들 사이로 멀지 않게 난젠지의 삼문이 보였다.  옆길로 난 빠른 샛길로 갈까 하다가, 삼문의 웅장함은 바로 정면에서 봐야지 싶어 일부러 정문으로 돌아 들어갔다.  사람들은 삼문 앞에서 사진을 찍고, 높다란 2층으로 올라가 교토 시내를 조망하고 있었다.  나는 그냥 산 속의 이 분위기가 좋았다.  그리고, 여기에 온 목적은 수로각을 보는 것이었다.  삼문을 지나 우측으로 들어가니 높다란 나무들 사이로 수로각이 보였다.  이끼낀 붉은벽돌이 쌓여 아치 모양의 다리가 되었고, 그 위로 물이 흐르는 구조물이었다.  150년 전 메이지유신 직후에, 비와호의 물을 교토로 끌어들이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탈아입구 사상이 만연하던 시대의 영향인지, 건축양식이 서양의 스타일 그대로다.  우거진 숲 사이에 이끼를 입고 색이 바랜 이 구조물을 보고 있으면, 마음 속에서 약간의 이질감 섞인 정겨움이 피어난다.  어울리지 않게 편안해진다고 해야 할까..  유럽 어느 동네의 구조물을 뚝 떼어다 어울리지 않는 이 동네에 일부러 가져다 놓은 느낌도 든다.  이상하게도 나는 이런 이질감이 좋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나가사키의 데지마를 좋아하는 것도, 아담하고 단촐한 일본의 시골마을에 근대 서양스타일의 성당이 혼재하는 풍경을 찾아다니는 일들이 설명된다.  

  바로 옆의 난젠지 나무건물들을 잠시 비켜두면, 수로각에 배인 시간은 높다랗고 이끼낀 나무숲의 정경과도 사뭇 잘 어울린다.  물은 여전히 다리 위의 수로에 흐르고 있었고, 인부들이 주변의 나무가지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차가운 숲공기를 마시며 나는 잠시 수로각 아래에 머물렀다.  잠깐이지만, 내가 이 곳에서 느끼고 싶었던 이 기분을 즐겼다.  흔적처럼, 이전의 여행에서도 이런 기분을 느꼈음이 생각났다.  이틀의 여정 첫날 오전, 나는 교토 난젠지의 수로각 아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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