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걸어가며 나는 자취방에 있는 음식들을 생각했다. 냉장고에는 지난 설에 회사에서 받은 레드향이 아직 몇 개 인가 남았을거고 그 옆에는 팽이버섯이 말라붙은 채 미라처럼 되어가고 있을 것이다. 레드향은 대표 입장에서 생색내기 좋은 과일 이었고 실제로 맛있었지만 솔직히 그냥 돈으로 주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계란은 최근에 한 판을 사서 충분히 있었고 늘 약속한 것처럼 맛있었다. 신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가장 분명한 증거는 인간을 창조한 뒤 닭을 창조해줬다는 것 아닐까. 흰자만 먹고 노른자는 먹지 않는다는 이들 이야기를 듣고 나는 그들에게 분명히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소돔과 고모라에 반드시 그들을 위한 주택이 있기를. 김치는 무려 세 통이 있었는데 모두 어머니가 보내준 것으로 아들이 그다지 김치를 먹지 않는다는 것을 아직 모르시는 것인지 늘 모자라지 않은지 묻고는 했다. 냉장고 생각을 하면 베이컨과 치즈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이 거대한 악의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싱싱하게 건강하던 감자가 서서히 싹이 나 독을 품으며 타락하는 것을 지켜본 적을 보았을 것이고 베이컨과 치즈는 그럼에도 세상은 살만 하다는 외침과 같았다. 모두가 썩어가는데 홀연히 부패함에 저항하는 꼴이 마치 세상 모두가 취했는데 나 혼자만 멀쩡하다는 굴원과도 같으니 어떻게 기특하지 않을까? 그러나 당분간 나는 냉장고에 있는 음식을 먹는데에 주저하게 될 예정이었다.
관장은 살을 빼기 위해서는 저녁을 먹지 않는 게 좋을 것이라 했으며, 식사도 보충제 포함 두 끼로 줄이는 것을 권했다. 마침 오늘은 살면서 처음으로 단백질 보충제를 저녁대신 먹고 온 날이었다. 내일부터 그 조언대로 한다면 평생 아침을 거른 적 없이 꾸준히 먹었던 내 신체로서는 굉장히 급진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이었다. 그 변화를 이겨내면 혁명이 일어나는 것인가?
허기라는 것은 참 신기해서, 이렇게 격렬히 운동을 하고 잠깐은 배고프지는 않았다. 우리 몸은 격렬한 운동중에는 허기를 느끼지 못하게 하는 어떤 신체작용이 일어나게끔 설계 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 사냥에 더 집중할 수 있을테고, 또 사냥을 성공하고 얻은 고기를 가져가서 먹을때까지 참을 수 있게 말이다. 그러나 이 잠깐이 오래가지 않을 것은 분명했다.
생각을 이어가다가 나는 집에 도착했다. 집이라기보다는 작은 쉘터같은 곳. 그러나 이보다 더 좁은 곳에서도 살아봐서 그런지 불편한 점은 없었다. 옷을 정리하고 샤워를 마친 후 냉장고를 열었다. 거기에는 탄산수와 스파클링 워터가 있었다. 제로 칼로리 음료들, 스파클링 워터는 아스파탐이 들어가 단 맛이 났다. 설탕의 수백 배 달면서 칼로리가 없는 인공감미료를 처음 접했을 때가 기억이 났다. 이게 정말 살이 찌지 않는다고? 어쩌면 매트릭스가 실제 이야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은 온데간데없이 데이터 쪼가리로 이루어진 각기 다른 세상에 모두가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단맛은 나지만 칼로리는 없는 물질이라니 100년전만 해도 아무도 믿지 않았을 것을 너무나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다. 모두 기다란 침대에 누워서 꿈을 꾸고 있는거지, 어쩌면 뇌만 남아서. 아주 조금 남은 스파클링 워터를 다 마시곤 그런 생각을 했다.
운동 후에 탄산수를 마시는 것이 이제 정해진 습관이 되었고, 여자친구는 그 얘기를 듣고 꽤 인상적으로 보였는지 칭찬을 했다. 단맛이 빠진 탄산수가 그저 좋아서 그런거지만 자세히 얘기하지는 않았다. 탄산음료는 청량감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 맛을 느끼려면 주스를 마시면 되는거 아닌가, 살이 안 찌는건 부가적인 것이고.
세탁기에 운동복과 양말, 샤워할 때 쓴 수건 등을 넣고 작동시킨다. 운동을 하면서 자주 빨래를 하게 되었고 그래서 늘 급속으로 조금씩만 하게 되는 것은 조금 낭비같기도 하다. 그러고보니 옛날에는 조금씩만 하라고 들은 것 같은데 요새는 많이 넣고 빨래를 하는 것이 권장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때는 빨래같은건 관심도 없던 시절이라 달라지는 건 없었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조금씩 하는 것이 좋은 것 같다. 꾸준히 뭔가를 하는 느낌이라 그런지 안정감이 있고 담백한 느낌이 든다. 드럼 세탁기 뚜껑을 닫고 시작버튼을 누르며 하루의 일과가 끝난다. 누르는 건 시작버튼인데 끝나는 느낌이 들다니 이상해. 글쎄, 끝은 또 다른 시작이고 하루의 끝이 주는 안도와 시작이 주는 부담감을 생각하면 합당한 것 같기도 하다.
오아시스의 리더 노앨 갤러거는 항상 아침에 일어나며 오늘은 어떤 즐거운 일이 있을지 기대를 했지 한번도 부정적인 생각을 한 적은 없다고 했는데, 그 말을 할 때 무척이나 덤덤했고 그래서 더 진실처럼 보였다. 그가 겪었던 가난하고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다. 행복은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가 정하는 것이 아니고 삶을 자신이 얼마나 통제하는지에 달려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살을 빼는 것은 나 자신을 컨트롤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지배의식을 만족하기에 가장 간단하고 확실한 일이다.
좁은 자취방에서 상념을 마치며 기원해본다. 오늘이 그렇듯 내일도 꾸준하고 즐거운 일로 가득차기를, 칼로리가 없어도 확실히 단 맛이 나듯, 가난한 삶에도 즐거움이 함께하기를. 나는 코카콜라보다 탄산수가 좋은 사람이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