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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이 Feb 19. 2024

예정된 실패

알베르토 사보이아, 『아이디어 불패의 법칙』

지난해 회사에서 새로운 서비스를 구상한다는 얘기가 나왔을 때, 토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서비스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이메일 주소를 받는 방식으로 제품을 만들기도 전에 시장성을 검증했다는 얘기였다. 약 2주라는 짧은 기간에, 비용도 거의 들이지 않고 제품이 될 놈인지 아닌지 알아냈다는 얘기는 너무나 매혹적으로 들렸다. 나는 팀원들에게 토스의 방법을 사용해보자고, 간단한 랜딩 페이지를 만들어 광고를 돌려보자고 제안했다. 안타깝게도 회사의 대표님은 본인의 직감을 훨씬 중시했지만 말이다.


내 제안이 회사에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토스의 방법론은 매력적인 선택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서비스에도 이런 방법을 사용할 수 있을지, 유사한 다른 방법은 없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사보이아의 이 책은 정확히 내 궁금증을 풀어주는 책이었다. 저자는 좋은 팀이 만든 제품이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가 시장이 원하지 않는 제품을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시장이 원하는 제품인지 아닌지를 검증한 후에 개발에 착수해야만 수많은 기회비용을 들이고 실패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어떤 유형의 프리토타입이 있는지, 프리토타입을 만들고 실험하는 방법과 구체적인 검증방법까지 설명해준다.


또 한 번 안타깝게도, 책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실패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 당장 눈길을 옆으로 돌려보면 시장이 원하지도 않는 서비스를 만든 후 실적 압박을 받고 있는 팀원들이 보인다. 한편으로는 기적같은 일이 일어나 우리의 서비스가 유저의 사랑을 받고 성공하길 바란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예정된 실패다. 시장성도 검증하지 않고 제품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서비스 기획 단계에서 진행된 유저 리서치를 생각해본다. 몇몇 알고 있던 잠재 고객들에게 의견을 받았는데, 그들은 이 서비스의 타겟 유저층과는 다소 괴리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이 서비스가 성공하든 말든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거기에 이미 몇몇 서비스를 성공시켰고 이 시장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대표님의 자신감이 사업의 성공 가능성을 증폭시킨다. 그렇게 기획과 개발이 시작되고, 이미 많은 자원이 소모된 뒤 서비스가 출시되지만 시장에서는 별 반응이 없다. 성과가 없자 팀원들은 서로를 탓하기 시작한다. 사실 문제는 그게 아닌데도 말이다.


사보이아의 방법을 적용했다면 모든 게 달랐을 것이다. 서비스를 소개하는 랜딩 페이지를 광고해 이메일 주소라도 받아봤다면, 기능을 간단하게 구현한 메모장을 만들어 잠재 고객에게 사용해달라고 부탁해봤다면, 이런 제품을 미리 구매하고자 하는 유저가 몇명이나 되는지 알아봤다면. 최소한 우리는 몇 개월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나 스스로에게도, 세상을 위해서도 도움이 되는 제품을 만들라는 감동적인 조언을 마지막으로 책을 덮으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책에서 제시하는 방법은 너무나 완벽하다. 하지만 이걸 회사의 문화로 정착시키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의사결정이 언제나 합리적인 방향으로 이뤄지지는 않는다. HIPPO가 가장 중시되기도 하고, 각 조직 구성원의 이해관계 등이 얽혀 이상한 결정이 내려지기도 한다. 의사결정권자가 비합리적인 방법론과 결정을 선호할 때, 우리는 그것을 막아낼 수 있을까? 나아가, 그것을 막아낼 수 있는 조직문화를 만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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