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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바라 Dec 10. 2020

<해리봉의 영혼탈출>#12.머리를 쓸어올리는 너의 모습

#12.♬ 머리를 쓸어올리는 너의 모습~♬



   2020년 새해가 밝았다. 올해 나는 머리를 기르기로 결심했다. 길게 길게 길러서 조선 시대 사람들처럼 댕기 머리를 땋고 싶다. 절대로 한달에 한번 머리 깎는 게 귀찮아서 결정한 건 아니다. 머리카락이 목덜미를 덮으면 얼마나 포근하고 따뜻한지, 누가 나를 감싸주는 느낌이다.


   물론 엄마는 “머리가 제대로 감으면서 기르던가”라고 잔소리 하는데, 환경 보호를 위해서 머리를 자주 감는 건 안 좋은 습관이다. 결벽증인 우리 엄마는 매일 아침마다 머리를 감는데 물이며 샴푸며 트리트먼트며 얼마나 많이 쓰는지, 이게 바로 환경을 해치는 습관이다. 기후 위기에 대응하려면 머리를 덜 감아야 한다.


   엄마는 새로 맡은 프로그램 때문에 작년 가을부터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난다는데 (엄마가 일찍 출근한 뒤로 아침 시간이 아주 평화로워졌다) 그 새벽에 어떻게 머리를 매일 감는 거지? 엄마는 정말 신기하다.


“머리를 감아야 잠도 깨고 정신도 맑아지거든~ 아침 7시에 라디오 방송 하려면 최소한 2시간 전에는 잠이 다 깨어있어야 일을 제대로 하지~!” 라면서 새벽에 일어나야하니까 저녁에 일찍 잠이 드신다. 덩달아 나까지 일찍 자야해서 좀 괴로웠는데, 나중엔 묘책을 찾아냈다.


   엄마가 밤 10시 쯤 잠이 들면, 그 뒤에 아빠랑 야식으로 몰래 컵라면을 끓여먹는 게 정말 스릴 넘치고 재미있다. 같은 라면이라도 몰래 먹는 라면이 훨씬, 훨씬 더 맛있다. 정수기의 뜨거운 물을 붓고 헤이 카카오한테 3분 타이머를 맞추고 아빠랑 체스 한 게임 한 다음, 라면을 후루룩 먹고, 그 다음에 베란다 창문을 열어서 냄새까지 빼면 완벽하게 아빠와 나만의 라면 비밀이 완성 된다.


   개코 엄마가 “어디서 라면 냄새가 나는데?”라고 할 때마다 아빠와 나는 한 편이 되어, “무슨 소리야~ 아랫집 냄새가 환풍기 타고 올라오는거겠지~” 라며 시치미를 뚝 뗀다. 이럴 때 아빠와 나는 쿵짝이 정말 잘 맞는다.


   암튼, 우리 엄마는 매일 매일 머리를 감는 일에 집착이 심하다. 그깟 머리 하루 안 감으면 뭐 어떻다구! 엄마가 자꾸 나한테 머리를 자르라고 잔소리를 하니까 어느날 밤에는 꿈에서 엄마가 내 머리를 밀어버리는 꿈까지 꿨다. 엄마는 “꿈에서라도 머리를 잘랐다니 속이 다 시원하네~~!!!”하며 남의 속도 모르고 호탕하게 웃는다.


   머리카락을 기르면 엘리베이터 기다릴 때, 혹은 횡단보도 앞에 서 있을 때 어른들이 한번씩 말을 건다. 나는 먼저 말 거는 건 별로 안 좋아하지만 누가 내게 관심 가져주는 건 참 기분이 좋다. 이런 걸 얌전한 관종이라고 하던데, 그럼 나는 얌관인가? 아직은 나도 나를 잘 모르겠다. 어떨 땐 부끄럽고, 어떨 땐 주목 받고 싶고. 어떤 게 진짜 내 마음일까?


   어떤 어른들은 내 머리스타일을 보고 축구선수 김병지 아저씨 같다고 얘기하는데 난 누군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축구선수는 손흥민 형 정도? 그 형은 어떻게 매 경기마다 그렇게 잘하는지, 신기하다. 안 떨릴까? 내게 축구는 악몽 그 자체다. 달리는 것도 힘든데 어떻게 공을 발로 차면서 뛸 수 있을까? 나중에 손흥민 형을 만날 수 있다면 내 각시탈로 영혼 체인지 한 번 해보고 싶다. 앗, 아니다, 취소다. 뛰는 건 너무 힘들어. 뛰면서 공 차는 건 더더욱 힘들어.


   나는 축구가 싫다. 축구를 하는데 풋살화를 신는 것도 싫고, (아니 왜 축구 할 때 축구화를 신어야지 풋살화를 신는 거지? 이해가 안 간다) 축구 하다가 넘어져서 무릎에 잔디 색깔로 초록색 물 드는 것도 싫고 친구들이 어깨로 치고 가는 것도 싫다. 엄마가 이 동네에서 친구들을 사귀려면 (정확히는 엄마가 엄마의 동네 친구들을 만들려면) 남학생들은 축구, 여학생들은 생활체육을 해야한다고 해서, 억지로 일주일에 한번 축구를 꾸역 꾸역 나갔다.


   2학년 때는 초등학생들을 위한 연합 축구 대회에 나가기도 했다. 축구 경기에서는 내내 나에게 공이 안 오기만을 기도하며 멀찍이 서 있었다. (공이 나한테 오지도 않는데 뛸 필요는 없잖아?)    


   그런데 하필이면 저 쪽에서 공이 내게로 튕겨 오는거다. 공 뒤로는 마치 아프리카 평원의 코뿔소 떼처럼 친구들이 내 이름을 부르며 흥분한 상태로 우르르 뛰어오는데, 마치 <라이언 킹>에서 무파사의 계략에 빠진 심바에게 달려오던 물소떼처럼 보였다. 나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살짝, 아주 살짝 옆으로 비켜섰다. 축구공은 경기장 밖으로 데굴 데굴 굴러가버리고, 공을 따라서 친구들도 우르르 뛰면서 지나갔다. 공은 결국 상대편 공이 되었다.


   “해리야, 친구 엄마들도 경기장 밖에서 전부 네 이름 부르면서 엄청 응원 했는데 안 들렸어? 해리가 공 옆으로 살짝 비키는데 엄마 얼굴이 화끈 거리더라”


   나는 내 이름 부르는 소리가 하나도 안 들리던데. 그저 축구공이랑 눈이 마주친 순간, 탁구 할 때처럼 딱 째려 봤는데 탁구공보다 너무 커서 그런지 눈싸움에서 졌다. 졌으니까 얌전히 옆으로 살짝 물러난 것 뿐이다. 축구공에 맞아서 눈에 멍 드는 것보단 피해서 안 다치는 게 더 중요하니까. 그 대회 이후로 나는 축구를 그만둘 수 있었다.


   2020년 2월부터 심각해진 코로나 때문에 3월이 되어도 나는 학교에 갈 수 없었다. 학교를 안 가면서 집에서 먹고 자고 놀고 했더니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길어졌다. 사실 내가 머리를 기르는 또 하나의 숨겨진 이유가 있다. 바로 아빠 때문이다. 힘도 쎄고 요리도 잘 하고 어깨도 넓은 우리 아빠에게 딱 한 가지 부족한 게 있는데 바로 ‘머리카락’이다. 작년부터 아빠의 머리카락이 먼지 날리듯 우수수 떨어지더니 자꾸 이마가 넓어진다.


   아빠는 내 이마에 자기 이마를 대고 “해리야~~ 머리카락 에너지를 나눠줘 ~~!!” 하신다. 매일 내 머리카락 에너지를 나눠주다가 결심했다. 얼른 머리를 길러서 아빠에게 모발 이식 해드려야지. 사실 온라인 수업 할 때 슬쩍 인터넷에서 탈모에 대해 이것저것 검색해봤는데 먹는 약도 있지만 모발 이식이 제일 확실한 해결책이라고 했다. 수술 해드릴 돈은 없으니 내 머리를 길러서 아빠에게 심어줘야지.


   사실 탈모는 유전이라고 해서 나도 긴장된다. 서울 할아버지도 담양 할아버지도 다들 머리카락이 별로 없다. 담양 할아버지는 머리카락에 헤어젤을 열심히 바르시는데 사실 앞쪽에 몇 가닥 밖에 없어서 젤을 바르면 물에 젖은 미역 같다. 할아버지가 되면 다들 대머리가 되는 건가. 그렇다면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머리를 기를 수 있을 때 열심히 길러야겠다. 미리 머리카락을 길러놨다가 나중에 필요할 때 꺼내서 쓸 수 있는 머리카락 저축은행이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헤어뱅크가 있다면 사람들이 물소떼처럼 엄청 몰려들텐데.


   우리 아빠가 만약 할아버지, 담양 할아버지처럼 머리숱이 없어진다면... 그렇다면... 밤에 조명을 안 켜도 될까? 은은하게 머리에서 빛이 나니까 수면등도 필요 없을 것 같다.


   과학 시간에 미래의 기술에 대해 배운 적이 있는데, 미래의 인간은 모두 대머리가 될 것 같다. 미래에는 기술이 발달해서 일종의 블루투스처럼 서로 머리만 닿아도 생각을 바로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럴 때 머리카락이 없어야 텔레파시도 훨씬 더 잘 통할테니까 머리카락이 필요없어지겠지.


   그나저나 혹시라도 각시탈로 아빠랑 바뀔지도 모르니까 최선을 다해서 아빠의 머리카락은 내가 지켜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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